Sermons-Korean

Sermons (Korean)


Philip Francis - Minister

By Rev. Dal McCrindle 03 Jul, 2022
2022년 6월5일 일요일 – 성령강림주일 말씀제목: “성령충만”(사도행전 2:4)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기도문 중 하나는 1662년 영국 성공회의 공동 기도집에서 "순결함의 모음"으로 알려져 있으며 성찬식의 시작 부분에서 읽혀지곤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 알맞아 보입니다. 모든 마음이 열려 있고 모든 욕망이 알려져 계시며 어떤 비밀도 숨겨지지 않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의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 마음의 생각을 깨끗이 하여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온전히 사랑하고 합당하게 영화롭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짧은 기도는 저에게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자 아마도 가장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성령의 본성과 목적에 대해서 최근 몇 년 동안 읽었던 거의 모든 신학 책들보다 더 나은 이해를 전달해줍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며 진리와 만물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다른 두 "위격"에 대해 말하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신 하나님의 아들, 즉 교사이자, 친구셨고, 구원자이자, 구주되시는 예수에 비교해볼 때 그러나 성령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은 성령을 나타내기 위해 흐르는 물, 내려오는 비둘기, 불, 바람 등 많은 역동적인 이미지를 사용합니다.(VU 375); 그리고 우리의 성경은 사도행전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사도행전 2:2) 또, 창조 이야기(창세 1,2장)에 있는 물의 표면에서 등장합니다. 저는 이 바람을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 중 하나인 "Breath on me Breath of God”에서 “나를 새롭게 생명으로 채우십시오"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숨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찬송가는 기도집처럼 우리에게 숨쉬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내 마음이 깨끗해질 때까지, 내 뜻이 당신과 하나가 되어 행하고 견딜 때까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숨을 쉬며 삶을 새롭게 하고 마음을 정화하여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순절 아침 다락방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약 120명의 제자가 모여서 “끊임없이 기도에 힘쓰더라”(사도행전 1:14)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강한 바람과 불의 혀로 상징되는 성령을 통해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혼란스럽고 낙담한 초기 제자들의 삶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을 역사의 흐름을 바꿀 능력을 지닌 이들로 변모시키십니다. 지금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이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느니라.” 그리고 돌진하는 바람의 소리와 방 안에서 들려오는 흥분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많은 무리가 모여서 “각 사람이 자기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며 어리둥절해 합니다”. 그들은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하며”라고 우리는 듣습니다. 그리고 누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 방에 있는 사람들은 평범한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들은 15개의 다른 언어로 군중과 대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군중은-"이 현상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의미를 새겨보면, 오늘 아침에 우리가 행했던 것처럼 먼저 “성령으로 충만한”(사도행전 2:4) 제자들이 모든 다른 언어로 말할 때 혀가 풀려진 제자들에게 미치는 변화와 효과를 살펴봅니다. 하나님의 숨결인 성령은 말 그대로 이 제자들에 영감을 주고 새롭게 하며 의심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정화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이 오순절 이야기에는 또 다른 중요한 그룹이 있습니다. 방 밖에 있는 바대인과 메대인, 엘람인, 메소포타미아인, 갑바도기아인, 그리고 그 오순절 축제 아침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다른 모든 방문객들은 이제 갈릴리 사람들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그들의 언어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외국어로 대화할 수 있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더 큰 선물은 처음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듣고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마음의 언어로 듣는 사람들에 의해 경험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통해 그 오순절에 교회가 탄생하고 군중 가운데 약 3,000명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여기 동일한 성령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 불고 있으며, 새로운 문을 열고, 가구를 재배치하고, 심지어 우리의 세상을 뒤집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 군중의 많은 사람들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숨결을 호흡했고 그것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고 있습니다. 개별적으로 그리고 희망찬 신자들의 공동체로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할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오순절 아침의 군중처럼 우리 중 일부에게는 성령의 음성이 극적이고 크고 명확하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몇 주, 몇 달, 심지어 몇 년에 걸쳐 더 조용히 그 음성을 듣습니다. "여전히 작은 음성"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때까지 끈질기게 우리를 부르고,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일에 스스로를 내맡기거나 또는 우리가 갈 것으로 예상하지 못한 곳, 특히 인생의 나중 단계에 있는 곳으로 인도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스러운 허리케인이 들이치는 드라마 같은 순간, 불 같은 혀와 갑작스러운 외국어 구사하는 장면을 목격한 그 첫 번째 군중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제 오순절 메시지가 그날 아침 다락방에 있던 “내부자”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또한 처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듣고 이해하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순절 메시지는 이 성소에 있는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를 통해 그리고 영적 성장의 길에 전념하면서, 특히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예술이나 음악, 춤의 보편적인 언어를 더 잘 사용할 수 있습니까? 이 커뮤니티에 이미 존재하는 언어 기술과 과학기술을 보다 상상력 있게 사용하여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몇 분 내로 성찬식에서 우리는 "오소서, 성령이여!", "Veni Sancte Spiritus"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개별적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또 우리 공동체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권능의 행적"을 듣게 하시고 "우리의 뜻이 주님과 하나가 되어 행하고 견디는 삶이 될 때까지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채워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소망하는 것을 주의깊게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나의 삶과 마찬가지로 이 공동체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며 하나님의 숨을 쉬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축복이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거룩하신 성령님께 감사드립시다. 아멘.
By Rev. Dal McCrindle 03 Jul, 2022
Sunday, May 29th, 2022 – Pentecost Sunday 2022년 5월 29일 일요일 – 부활절 일곱번째 주일 말씀제목: “주님의 부름 가운데 있게 되는 소망”(에베소서 1:18) 바울의 에베소서는 아마도 로마의 감옥에서 그의 삶의 말년에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예수 그리스도에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는 구절을 통해 소아시아에 있는 여러 다른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와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시 동안 우리가 그들 중 하나이고 이 편지가 여기에서 우리의 예배에서 며칠 동안에 걸쳐 읽혀질 수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교회 창시자인 사울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은 지 약 20-30년 후에 사도 바울이 된 각 단어에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이제 바울이 먼저 그들을 축복하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엡 1:2)고 칭찬하는 것을 들으십시오. “주 예수를 믿는 너희 믿음과 너희 사랑을 내가 들었노라 모든 성도를 향하노니 이러므로 내가 기도할 때 너희를 기억함과 같이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노라.” (엡 1:15). 그리고 바울은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오늘 아침 여기 교회당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이는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가 너희를 부르신 바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려 함이라..." 잠시 시간을 내어 이 기도를 다시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실 것입니다. 한 번에, 또는 갑자기 사울의 회심과 같이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우리는 지혜 가운데 자라나고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는” 신성한 계시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짐”으로써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는 희망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기도는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지도록 우리 개개인에게 말하며, 그는 또한 공동체로서 교회와 교회에 속한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소망”이란 무엇일까요? 지난 주일 여러분은 Sandi가 제출한 우리 교회의 사역 프로필 위원회 보고서를 검토하고 승인했습니다. 따라서 13페이지와 14페이지에서 해당 보고서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희망"의 아름다운 표현을 보셨을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고 보고서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이 비전은 우리 자신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다른 신앙 공동체 및 지역 사회 단체와 협력하여 이 희망을 현실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영적 성장의 길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제 캐나다 연합 교회의 ProVision Fund가 지역 사회 파트너십을 개발하기 위한 전도 사역 비용으로 St. David's에 $20,000의 교부금 요청을 승인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초대 교회와 오늘날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통해 온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고, 믿음의 형제자매도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더 깊이 더 많이 알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서 우리를 결합하는 것이 여전히 우리를 나누는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하나됨”, 곧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이 성령 안에서의 연합의 중요성에 대해 의심이나 망설임이 있다면, 오늘 요한복음을 읽으면 확실히 해소될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배반당하시기 전 저녁에 제자들과 친구들을 부르셔서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기 위해 다락방으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또한 저희 말씀으로 나를 믿는 자들을 위하여”(요한복음 17:20) –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우리를 위해, 그리고 지금 우리 교회에서 우리를 위해 –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고… 그리고 아시다시피, 라틴어 형식의 이 기도는 “Ut unum omnes sint”(“그들이 하나가 되기를”)로 되어 있으며, 캐나다 연합 교회의 문장에 있습니다. 연합하였고 또한 연합하여 나가는 교회로서 – 그것은 우리의 역사에 있고 우리의 DNA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우리 교회의 미래를 바라볼 때, 두 본문 안에서의 이 두 기도는 우리의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망인 이 사랑하는 공동체에 대한 주님의 희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우리를 부르심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기업의 풍성이…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엡 1:18-19)라는 순수한 선물로 주어지는 소망입니다.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 이상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미래의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과 일치 안에서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공동체에 대한 기도이며, 모두가 하나가 되는 일치에 대한 기도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항상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지루한 일인지, 그리고 적어도 우리 교회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누구의 것인지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요 한 분 주님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통일"은 "균일함"과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주님께 감사한 일인지요! 우리 모두는 한 공동체의 삶과 일을 헤아릴 수 없이 풍요롭게 하는 다양한 문화, 전통 및 정체성의 다양성을 환영하고 축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Living Faith Story에서 우리 교회의 “다양성, 포용성, 평등을 사랑하는 곳”으로 만들 계획을 하게 되어 매우 기뻤습니다. “다양성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온전히 알고 사랑하고자 하는 공동체, 지혜와 계시 안에서 성장하는 공동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공동체, 외롭고 소외된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포용하는 공동체로서의 우리 교회에 영감을 주는 비전입니다. 친구 공동체와 무엇보다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요 13:34-35)는 명령을 받은 겸손하고 충실한 신자들의 공동체는 감동과 기쁨으로 예배하고, 열린 마음으로 배우며, 친구처럼 서로 보살피고, 평화와 정의를 위해 세상에 손을 내미는 것은 분명 "North Shore의 자비로운 심장"으로 알려지게 될 우리 교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아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아멘.
By Rev. Dal McCrindle 28 May, 2022
Sunday, May 15th, 2022 – Easter 6 2022년 5월 22일 일요일 – 부활절 여섯번째 주일 말씀제목: “나를 기념하라”(요한복음 14:23-29) 부부 모임의 초대로 다니엘에 대한 특강을 한 목사는 다니엘의 세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풀무 불에 던져진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양복 재킷 안에 그 이름들을 써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연히 다니엘의 세 친구의 이름을 거명할 시간이 되자 그의 마음은 텅 비어버렸습니다. 재킷 안을 들여다보면서, 그는 Mister, Big & Tall을 불쑥 내뱉고 말았습니다! 노화의 주요 장애는 세부 사항을 기억하는 능력의 상실인 것 같습니다. 특히 사람들의 이름과 제 경우에는 휴대폰을 두고 온 경우입니다! 시계에서 전화를 걸고 빙빙 돌아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노화의 주요 장애는 세부 사항을 기억하는 능력의 상실인 것 같습니다. 제 경우에는 특히 사람들의 이름과 휴대폰을 두고 온 경우입니다! 시계로 전화를 걸고 빙빙 돌아보면서 핸드폰을 찾으러 다닐 수 있다는 점은 참 좋은 기능입니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로 인해서 이전에 정기적으로 보던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머릿속에서 사라진것을 요즈음 눈치 채셨습니까? 방파제에서 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누군가를 만납니다. 당신은 인사를 하지만 그들의 이름이 마음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나이가 들면서 세부 사항을 기억하는 능력이 약간 퇴색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것은 심각합니다. 21년 전 심장 수술 후 거의 하루 종일 전신 마취를 받았을 때 부작용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기억 상실에 대한 좋은 설명처럼 보였지만 익숙해져야 하는 노화의 뱃지 중 하나는 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포스트 코로나의 기억은 참으로 짜증납니다! 기억은 보는 것과 같다. 제가 어렸을 때 멀리서도 도로 표지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여동생은 약간 시각 장애가 있거나 지금은 장애자라고 부르는 도로 표지판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천천히, 사실 그렇게 느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저는 제 텔레비전이 선명함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때 아름답고 선명한 사진이었던 사람들의 얼굴 주변이 흐릿하게 번졌습니다. 이에 대한 빠른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새 TV를 구입하는 것입니다! 거의 동시에, 저는 거리 표지판의 글자들이 예전만큼 크게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트럭 콘솔에 작은 쌍안경을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고 길을 찾아야 할 때 이 쌍안경을 꺼내서 살짝 엿보곤했습니다. 그렇게 들여다보면 거리 이름은 크기가 적당하고 읽을 수 있는 크기가 되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산책을 할 때 나는 멀리 있는 산들이 곧 교체될 내 텔레비전의 그림처럼 흐릿해져가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유레카의 순간이었습니다. 날씨는 맑았고 구름이나 안개가 없었습니다. 산은 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선명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안경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마지못해 예약을 하고 검사를 받았고 많은 시력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제 시력을 원할 정도는 되지만 첫 번째 안경 세트를 받았습니다. 모든 사물이 조금 가깝고, 거리감이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진화된 장비를 착용하고 세상으로 나가 산이 언제나 그랬던것처럼 날카롭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저 표지판들! 글쎄, 나는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멀리 길을 보고 있지 않는 한 쌍안경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제가 집에 돌아와서 텔레비전 앞에 앉았을 때, 보라, 흐릿해져 보이던 TV수신상태가 치유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늙어가는 것을 수술 후유증처럼 구체적이고 정의할 수 있는 것으로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너무 오랫동안 마취제를 너무 많이 복용하면 뇌세포가 단순히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화학적 독성으로 죽어갑니다. 사실 그랬으면 좋겠어요! 노화에는 문제가 있죠. 나이가 들수록 기억해야 할 세부 사항이 너무 많은 것 같아. 메모리 과부하는 내 컴퓨터에 항상 일어난다. 왜 우리 뇌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됩니까? 사람들의 이름이나 안경의 위치, 친구나 의사와의 커피나 점심 약속, 아직 쓸만한 우리의 치아와 같이 기억해야 할 것만 기억할 수 있다면 삶은 훨씬 더 수월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중요한 것만 기억하고 쓸모없는 것들을 모두 원치 않는 지하수처럼 스며들게 할 수 있다면, 나이가 많든 적든 모든 인간에게 기억력을 훈련하고 향상시키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더 힘들어져요. 정보는 뇌의 저장과 분류 체계 속 어딘가에 숨겨져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그것을 기억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들은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즐기고 계십니다. 주님은 떠날 준비를 하고 계시며 자신이 체포되어 살해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유월절 식사는 갑자기 슬픈 예비 추모일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들 곁을 떠나가실 것이지만 하나님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자들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을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정말로 문제를 겪고 있고 너희 삶이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느낄 때, 앉아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모든 것을 기억하여라. 왜냐하면 너희가 이 모든 세부 사항을 기억한다면 너희는 괜찮을 것이야. 교회 헌금 접시에서 몇 개의 동전을 주머니에 넣고 싶은 욕망에 직면했을 때 설교 #37B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것입니다.” 아니, 주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으셨어요. 예수님은 “아침에 일어나 산상수훈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암송하면 잊지 않을거야. 그렇게 하면 내 모든 가르침을 손끝에서 바로 얻을 수 있다고. 그는 "오, 요한아 너가 사역을 시작하고 내 삶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기를 바래. 심지어 그것을 요한복음이라고 할 수 있어. 그렇게 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내 말을 듣게 될 거야. 그리고 잊어버린 것이 있으면 사람들이 우리 책을 찾아 그곳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을거야. 마치 내가 여전히 너희와 함께 있는 것처럼 될 것이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사실, 우리는 이러한 복음서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바울과 베드로, 야고보, 디모데의 편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곁을 떠나시지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헬라어로 파라클레이토스라고 하는 위로자 곧 동반자를 우리 곁에 보내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임재가 자신의 임재, 곧 그들과 함께 하실 하나님의 임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그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셨던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상기시켜 줄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종류의 기억 훈련이 나쁘거나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임재를 약속하셨습니다. 많은 교육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머리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그리고 항상 알고 있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아 맞아, 기억나!"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영에 의해 쿡쿡 찔리는 이런 순간들은 언제 옵니까? 성령님은 언제 일하십니까? 글쎄요,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열거할 때일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암송을 위해 인용할 수 있을 정도로 여러 번 읽은 구절일 것입니다. 그리고는 성경본문의 무언가가 튀어나와 우리를 뒤흔들고 전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를 움켜쥡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것을 천 번을 읽거나 들었지만 그런 식으로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이제 기억합니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또는 우리가 세상 전체가 우리 주위에서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는 매우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면. 그런 날이 있었나요? 오, 여러분이 그러한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잘못되게 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황폐화시킬 수 있는 것은 이보다 더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계시거나 존재한 적이 있는지조차 의심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하나님은 나를 신경쓰시지 않는 것이 분명해. 며칠이 지났습니다.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런 다음 여기 예배에서, 음악에서, 성경에서, 찬양과 설교를 통해 만지고, 한 눈에, 단지 그 장소의 냄새, 어린 아이의 소리지름 가운데 우리는 말합니다. “예, 저도 하나님이 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요. 아마도 놀라운 일몰, 언덕 뒤의 구름, 아마도 깃털의 존재, 천둥소리, 번쩍이는 불빛, 손의 감촉까지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 목 뒤의 머리카락이 서있고 신이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더 말할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 하나님의 영입니다. 왜냐하면 내 고난이 끔찍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께 꽉 잡혀있는 매우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거의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어 내 곁에서 동행하게 하심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할 때마다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합니다. 우리 예배의 많은 부분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을 많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를 기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운명의 날에 예수님 옆에 매달린 죄수가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나를 기념하라, 나를 기억해. 예수님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기억하기만 하면 성령의 때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버려진 것도 아니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아멘.
By Philip Francis 14 May, 2022
Sunday, May 8th, 2022 – Easter 4 Philip’s Reflection: “The Shepherd and the Sheep” (John 10:22-30) 2022년 5월 8일 일요일 – 부활절 네번째 주일 말씀제목: “목자와 양”(요한복음 10:22-30) 오늘은 잉글랜드 서부의 작은 마을에 살고 계시는 현재 92세의 사랑하는 어머니 로즈마리가 특히 생각나는 날입니다. 그녀는 Frances Rosemary로 태어났고 아버지와 결혼하여 Frances Francis가 되어 Rosemary로 알려지게 되었고 2주 후 그녀를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으며 오늘 이 주일 아침 저는 제 어머니를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목자와 양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본능적으로 영국 시골의 중심부에 있는 암양과 그들의 어린 양이 가득한 가정집을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그 광경을 보기 전에 양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나는 아침이나 저녁에 종종 문 앞에 서서 푸른 들판을 바라보며 목자가 양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도착하는 것을 지켜봅니다. 그것은 수백 년 동안 반복된 익숙한 장면입니다. 목자가 그들을 부르고 먹이통을 채우고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에게로 오고 그는 양들의 이름을 부르며 모두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물과 먹이를 주어 기릅니다. 그리고 몇 주에 한 번씩 양치기와 양치기 개는 양 떼를 모아 가까운 들판으로 인도합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신선한 풀을 뜯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인도하는 곳으로 갑니다. 그들은 그를 신뢰하지만 전적으로 목자만을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들판에서 모든 양들은 반대 방향으로 달려갑니다. 목자에게 잡힐 위험이 없는 곳으로 말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먹이고 물을 주며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돌보고 그들의 이름을 알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친숙하게 들리시나요?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특히 오늘, 평소보다 좀더 감성적으로 들리신다면 죄송합니다. 여기서 우린 비유를 너무 멀리 확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중 육식을 하지 않는 어떤 이에게는 이 친숙한 목가적 장면에도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물론 윌리엄 블레이크의 유명한 찬송(“예루살렘”)의 “England’s pleasant pastures”에서 목양을 하는 것이 1세기 팔레스타인의 생계형 목축업의 상황과 심지어 오늘의 양은 우유로 치즈를, 양털은 의복과 보온을 위해 사육되어지는 목축업 환경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동요의 이러한 털이난 동물을 테마로한 곡과 나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 본문의 말씀을 다시 듣기 원합니다. 종교 당국자들이 성전에서 예수님께 나아와 좌절감과 불만을 품고 “언제까지 우리를 불안하게 하실 겁니까?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십시오.”(요 10:24)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 왜냐하면 “너희가 내 양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의 양 중 하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10:27-28).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부드러운 말씀에서 복음 메시지의 핵심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양이 된다는 것은 생명으로 인도되고 안전하며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보호되는 것입니다. 그가 이끄는 곳을 따라가는 것은 목자를 알고 목자의 계산 안에 들어가지는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신뢰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노래한 것처럼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1-3).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안전함을 우리에게 보증하는 것은 양치기의 손을 통한 보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 약속은 “내가 [내 양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 삶의 질, 풍성한 삶에서와 같이 “영생”, 지금 여기, 영원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삶입니다. 우리의 지상 생활의 길이 또는 영원한 내세에서의 천국의 축복의 약속. 풍성한 생명, 영생은 그에게 속한 것에 달려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르는 것 말입니다. 지난 제 직장 생활의 대부분은 “훌륭한 리더는 더 많은 추종자보다 더 많은 리더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리더십의 이해를 바탕으로 지내왔습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좋은 리더는 멘토링, 훈련, 좋은 근무 습관의 모범이 되어서 그룹원을 이끌고, 새로운 리더를 모집하고, 격려하고, 성장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4년간 신학교에서 "훌륭한 리더십"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와 교회에서 누군가를 사역의 훌륭한 리더로 만들 수 있는 자질들(경청하는 기술, 공감, 겸손, 비전, 취약성, 적응력 및 물론, 자기 관리 및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네, 필립은 이 모든 분야에서 여전히 배울 것이 많다고 여러분은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내가 지금 하는 것처럼 이 가르침의 많은 부분, 교실에서 보낸 오랜 시간, 현장 교육,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논문과 시험 등의 용어가 더 많은 관련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좋은 양이 되는 것보다 전문적인 목자가 되는 것, 말 그대로 "목회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은 우리에게 다른 이해를 제공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10:27). 그리고 우리 모두는 더 나은 양이 되는 법을 확실히 배울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가장 가능성이 낮은 장소와 가능성이 가장 낮은 사람들에게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인식하고 목자의 음성이 이끄는 곳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목자가 약속한 은사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에서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교회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가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 목자가 이끄는 곳을 따라간다면, 그러면 “[우리]의 평생에 [우리]가 반드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따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양으로 사는 법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목자가 되시도록 합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목자를 더욱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양들을 축복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By Philip Francis 08 May, 2022
Sunday, May 1st, 2022 – Easter 3 Philip’s Reflection: “Hearing the Voice of Jesus” 2022년 5월 1일 일요일 – 부활절 세번째 주일 말씀제목: “예수님의 음성 듣기”(요한복음 20:22) 저는 항상 개인적인 변화에 대한 이야기, 특히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역경을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여 감옥에서 20년 이상을 보냈고 남아프리카 민주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위대한 사회 개혁가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젊은 시절을 부유한 영국 사교계 명사로 지냈으나, 노예제 폐지에 대한 평생의 열정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궁극적으로 성공했습니다. 또는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Terry Fox, Nova Scotia의 흑인 인권의 선구자 Viola Desmond 또는 캐나다의 보편적 의료 시스템의 창시자인 Tommy Douglas를 생각합니다. 이들은 모두 역경을 극복하고 변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이러한 변혁의 과정을 이끌어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개인적인 비극이나 죄를 포함한 역경을 극복하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존경받는 믿음의 거장이 된 인물들이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야곱이 가장 아끼던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질투하는 형제들로 인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마침내 파라오 다음으로 2인자가 되었으며, 한때 그를 멸시했던 형제들을 포함하여 유배되어 있는 히브리 사람들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지위를 사용했습니다. 또는 모세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집트인을 죽이고 도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을 향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인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고통, 불순종, 폭력의 개인적인 역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묘사된 다윗 왕(삼상 13:14)은 어떻습니까. 이 모든 사람들과 구약의 다른 많은 위대한 인물들은 어떤 형태의 신적 개입(꿈, 불타는 떨기나무, 또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 후에 개인적인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부서지거나 불길한 인생의 한 시작점으로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신약성경의 본문 2곳에 이르러 말씀이 우리 자신의 삶과 관련이 있을 수 있는 개인적인 변화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다소의 사울입니다. 첫 등장에 바울사도와 같이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될 인물에 대해 이를 넘어설 만한 인물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울이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장소의 증인으로 서있었음을 들었고, 사울이 “살인을 승인”(행 7:58)했다는 말을 듣고 그의 명성은 다음과 같이 높아졌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새로운 종교와 진리의 길"에 있어서 초기 추종자들에 대한 무시무시한 박해자로 말입니다. 그는 "집집에 들어가 교회를 황폐화시키고 남자와 여자를 모두 끌고 가 옥에 가두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8:3). 그리고 그는 이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여전히 주의 제자들을 향하여 위협과 살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극적인 회심 중 하나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어난 일이 먼지 투성이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회심의 경험"에 이름을 붙였지만, 사울의 삶에서 이 극적인 방향의 변화를 이끈 것은 무엇이고 사울을 사도 바울로 변화시켰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핍박함으로써 나를 핍박하는 것이라고 사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울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동일시하고 여전히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사울이 그들 가운데 있는 신성한 임재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그 깨달음은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다른 유형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몇몇 제자들이 이전 직업인 어부로 돌아가서 밤새도록 낚시를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해안가에서 낯선 사람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물을 저편에 던지라”고 하니 이제 그들은 그물에 상당한 고기를 채웠습니다. 그들의 그물에는 “큰 물고기가 가득 찼으니 153마리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이 신비한 이방인이 부활하신 예수님인지 알았기에 그 누구도 이 분의 정체를 물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때때로 "마지막 아침 식사"로 불려지는 조반을 먹기위해 앉았습니다. 예수께서 빵과 포도주를 대신하여 떡과 물고기를 드시고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고 물고기도 그와 같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입니다. 바로 이 베드로, 가장 신뢰받고 사랑받는 제자 중 한 사람이며, 배반당하던 밤에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무려 세 번씩이나 부인한 바로 그 베드로가 지금 질문을 받습니다. – 세 번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그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 주님,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부인과 배신의 기억 속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을 회복할 기회, 수치심을 씻어낼 기회를 주고,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복음의 신령한 양식으로 양들을 돌보고 먹이는 역할에 충실하면서, 고난 받은 자의 복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그것은 그 자체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지금 용서받는 사람을 위한 변화시키는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마 여러분이 들은 또 다른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여러분에게도 말하는 것처럼 저에게 개인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그리고 이것은 제가 앞서 언급한 모든 위대한 개인적 변화의 예(만델라, 윌버포스, 테리 폭스, 비올라 데스몬드, 토미 더글라스, 구약성서의 위대한 성경 인물들)의 공통점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누군가” 또는 “무언가 ” 그들 주위에 띠를 매고 그들이 가지 않기로 선택한 곳, 가지 않기를 원하던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위험이나 역경을 겪거나, 필멸의 삶이나 죄에 대한 두려움과 맞서야 했던 곳으로, 그 과정에서 그들은 지도력이나 모범 또는 옹호를 통해 변화되고 세상은 더 나은 장소가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가 들은 두 사람 곧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던 다소 사람 사울이 사도 바울로 변하고 요한의 아들 시몬이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이 베드로는 그 이름대로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둘 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둘 다 허리띠를 매고 있는 사람에게 항복했고, 둘 다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끌려가 결국 순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사랑하는 공동체로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변화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음성은 사울에게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올 수 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와 같이 더 분명하고, 더 크고, 끈질기게 그 음성을 들을수록 더 점진적으로, 아마도 인생 후반부에 오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항복하고 가고 싶지 않은 곳, 즉 양을 돌보거나 양에게 먹이를 주도록 인도받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음성, 예수님의 음성이 오늘 여러분과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VU 26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음성이 들리면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당신을 어디로 인도하든 간에 그것이 당신의 삶을 바꿀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아멘.
By Philip Francis 29 Apr, 2022
2022년 4월 24일 일요일 – 부활절 두번째 주일 말씀제목: “하나님의 숨결”(요한복음 20:22)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부활절 저녁에 제자들이 잠긴 문 뒤에 웅크리고 앉아서 불과 3일 전에 예수를 죽인 자들의 손이 자신들에게 해꼬지를 할까 두려워하는 것을 배경으로 합니다. 같은 날 아침에 마리아와 여인들은 빈 무덤 앞에서 돌이 굴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내가 주님을 보았다”고 말했고 그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녀를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제자들은 빈 무덤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시체가 십자가에서 옮겨지는 것을 보았고, 예수님이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보았는데 말이지요. 죽음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습니까? 이 부활절 저녁에 기뻐하고 의기양양해 하기는커녕, 우리는 패배와 절망의 벼랑 끝에 서서 비통해하고, 완전히 혼란스러워하며, 충격에 빠져 있는 한 무리의 제자들을 대신해 서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그들이 만나고 있는 방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들은 세상과 세상의 모든 고통과 위험을 차단하고 그들 자신을 가두어 그들이 성소와 피난처를 찾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최근에 일어난 모든 일, 즉 다락방에서 친구들과 함께 하는 유월절 만찬,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행위와 제자들 자신의 배신과 부인, 재판, 매질과 메시아의 십자가 처형 등 최근에 일어난 모든 일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의 시체조차 빈 무덤에서 사라졌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그들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려울 때 우리는 세상을 차단하고 싶어합니다. 글로벌 전염병이 얼마나 길게 지속될 것인지의 여부와 또는 우리가 텔레비전 화면에서 목격하는 여러 공포들 예를들어, 총기 폭력의 치명적인 영향이나 또는 매달 점점 더 악화되는 것으로 보이는 합성마약의 확산 그리고 현재 우크라이나의 가슴 아픈 죽음과 파괴 장면, 또는 훨씬 더 치명적인 신식 군사 무기의 등장과 실험들 –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을 차단하고, TV를 끄고, 내면으로, 우리 자신을 향해 돌아서고 싶은 유혹을 받지 않습니까? 우리가 내려야 하는 결정과 우리가 원치 않는 관중 이상이 되려면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 두려운 것입니다. 매일 증가하는 것처럼 보이는 고통이나 불의한 상황에 직면하여 무력해 보이는 것이 두려워 우리는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또는 안전한 성소로 후퇴하여 갇힌 자아 속으로 물러납니다. 예수님의 처음 열두 제자들처럼 두려움과 우유부단함 속에 갇혀버린 상태로 말입니다. 그리고 예기치 않게 닫힌 문 뒤에 있는 겁에 질린 사람들의 모임에, 그들의 두려움 한가운데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개입하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평화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말로 제자들을 맞이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주셨고, 그들은 이제 예수님을 부활하신 주로 인식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제자들의 두려움이 기쁨으로 바뀌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로 갈게.";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 너희에게 주는 나의 평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그러나 그의 외모에는 약속의 성취보다 더 많은 것이 있습니다. 그의 부활의 증거보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다는 살아 있는 증거보다 훨씬 더 말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이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넣어주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그분은 새로운 삶, 잠긴 문 너머에서 살아갈 삶, 용서받고 용서하는 삶을 위해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다르게 볼 것을 요구하는 것은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경험하려면 지나간 것을 버리고 지나간 것을 용서하도록 부르는 비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용서하시는 능력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제자들이 변화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개인적으로나 공동체로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전염병의 세계적인 대유행의 광야에서 벗어날 때,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후퇴했을 때, 우리가 의미와 목적을 찾았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할 때 우리가 용서하기보다는 비난했을 때, 또 과거의 불만을 풀어주기보다는 간직할 때; 우리가 특히 우리 자신에 대해 엄격하고 비판적이며 용서하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우리도 문을 잠갔을 때, 때로는 해야 했기 때문에 하지만 더 자주 우리가 세상을 들여보내는 것이 두려웠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서 예수님을 차단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또 어떻게 될지 두려워합니다. 폭풍우 치는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요 6:20)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변화산에 오르신 후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부활하셨지만 여기에서도 그들과 직접 함께 계시는 이 다락방에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그리고 일주일 후 도마에게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인다면,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두려움을 희망으로, 또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실 때 창문과 문이 닫혀 있는 이 성소에서 오늘 아침 “평화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심판이 아니라 평강을 주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으시고 성령을 불어넣어 이 예배당과 우리 가정의 문, 그리고 우리 마음의 잠긴 문을 열 수 있게 하는 새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새로운 세계로 자신 있게 나아가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미하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려고 여기, 심지어 지금 우리 가운데로 오시는, 성령으로 보증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태초에 창조물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것과 같은 호흡입니다. 이 호흡은 마른 뼈들의 골짜기에서 그 뼈들에 생기를 불어넣으매 뼈들이 살아났으며, 부활 후 첫날 저녁에 다락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불어넣으신 바로 그 하나님의 호흡이며, 이제 우리와 이 사랑받는 공동체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호흡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빗장을 열고 그 문을 활짝 열어 용서받고 용서하는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받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기뻐합시다. “하나님의 숨결이여,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어, 우리가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하소서..."(VU 382). 아멘.
By Philip Francis 21 Apr, 2022
2022년 4월 17일 일요일 – 부활주일 말씀제목: “빈 무덤” (누가복음 24:1-12)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 118:24) 세인트 데이비드 교회에서 첫 번째 부활절 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이 아침, 여러분과 함께 하게 되어 저는 매우 기쁩니다.. 부활절은 교회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축하 행사입니다. 부활절이 없었다면,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의 첫 제자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결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지속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이 없었다면 우리는 성금요일에 대해서도 몰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로마 제국 군대의 점령군에 의해 수행된 수천 건의 끔찍한 처형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주민 400명 정도의 작은 마을인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이곳저곳을 유랑하는 유대인 농민 지도자의 죽음에 대해 무엇이 그렇게 특별했습니까? 우리 모두는 종종 우리 초기에 형성된 부활절에 대한 우리 자신의 "사전 지식"을 가지고 오늘 아침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리고 제 설교는 약 20년 전 어느 주일 아침 강단에서 해방적인 메시지가 선포되었던 것에 의해 영감을 받아 준비하였습니다. 그 설교자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저는 그런 일이 실재로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활이 진실로 일어났음을 압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 아침에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무덤에 천사가 한 명인지 두 명인지에 대한 세부 사항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말한 것; 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신 빈도와 장소. 그러나 부활절 이야기의 의미에 중심이 되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과 원하는 경우 몇 가지 기본 사항이 있습니다. 사흘 후에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막달라와 여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의 몸을 변화시키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이 보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형태로 즉 실제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 사항조차 강조하거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문제에 휘말리면 부활절 이야기의 중심 의미를 놓칠 위험이 있기에 저는 그 방향으로 설교를 진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 그 진실성, 진실을 말하는 것은 사실성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부활절 이야기의 중요성은 그 의미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오늘 부활절의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는 우리가 예수님의 몸을 새 생명으로 살리는 부활을 피할 수 없는 십자가 처형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그것은 지나간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함을 믿습니다). 십자가 처형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예수님을 높여드리는 부활절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부활에 완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십자가형의 살인적인 본질로 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형은 다른 사형 집행 방식과 달리 죄 아래 있는 인간 상태의 타락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잔인하고 정당하지 못하며 문자 그대로 참혹한 죽음을 당하셨고 그 십자가에서 주님은 세상의 죄와 슬픔과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간단한 진리가 있습니다. 부활절 메시지의 기쁜 소식은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하나님이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시신이 무덤에 안장되어 인봉되었다는 “사망 직후 주간 첫날”에 대한 누가의 기록을 듣습니다. 그러나 무덤은 그를 가둘 수 없었습니다. 여인들은 그 돌이 굴려진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시신이 묻힌 땅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를 찾느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이기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예수님을 일으키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비전에 대해 결정적으로 "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인 세력에 대해 단호한 "아니오"를 표명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권세, 즉 점령, 야만성, 불의가 여전히 우리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인종청소와 대학살, 문화가 다른 집단을 향한 학살의 역사, 그리고 이제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점령군의 범죄 행위를 상기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차원에서 부활의 의미는 매우 정치적입니다. 예수의 수난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로마 제국의 통치자와 지배 체제가 아니라 왕이라면 지상에서의 삶은 어떠할까요? 그리고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과 정의에 대한 그의 모범과 가르침에 대해 “예”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문제가 불의이며 해결책이 하나님의 정의임을 계시합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에서 하나님은 예수님과 그를 예루살렘으로 인도한 정의에 대한 열정과 처형을 변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추종자로서 우리는 UCC 신조에 따라 “정의를 구하고 악에 저항”하며 폭력이나 차별을 통해 모든 종류의 불의를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공감과 연대를 나타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정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강렬하게 개인적인 것이므로 좀 더 개인적인 메모로 끝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대해 성찰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내 인생의 대부분을 이 [육신을 쓴 십자가]가 십자가의 중심 이미지였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고난 받으신 예수님의 이미지이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자아, 성공이나 인정에 대한 자신의 욕망에 몰두하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덜 관심을 갖고, 예, 때때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이미지는 평범한 십자가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제가 공개적으로 지고 있는 십자가입니다. 그 위에는 고통받는 몸이 없습니다. 사실 그것은 빈 십자가, 당신이 처음에 왔을 때 보았던 십자가입니다. 오늘 아침 성소. 고난 받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빈 무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과 같은 변화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부활주일에 우리는 십자가의 또 다른 이미지를 목격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은 수선화와 튤립으로 장식된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희망과 새 생명, 실제로 풍부하고 아름다운 삶에 대해 말하는 십자가입니다. 봄이 겨울을 따라가거나 꽃이 다시 피거나 부활절 토끼가 오늘 아침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방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의도적으로 변형된 십자가, 고통과 죽음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삶 즉, 작은 자아의 죽음, 두려움과 결핍의 죽음, 질병과 고통의 죽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삶을 가리키는 그래서 평화와 정의와 연민에 헌신하는 삶,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 이후의 새로운 삶과 희망; 이 잔인하고 범죄적인 전쟁 이후 우크라이나에서의 새로운 삶을 가리키는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저에게 부활절 이야기의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가장 단순하게는 사회적 또는 정치적 수준에서든, 공동체 차원에서든, 또는 오늘 아침 여기에서 우리를 위해 개인적인 수준에서든 변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변화의 여정에 초대받았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의 빈 십자가와 빈 무덤, 새 하늘과 새 땅, 즉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왕국에 대한 환상을 주셨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부활을 통해 입증하신 환상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아침에,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되기를 원하시는 사람의 상이나 공동체가 되기에 결코 늦지 않았다는 것을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렐루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아멘.
By Philip Francis 30 Mar, 2022
Sunday, March 27th, 2022 – Fourth Sunday in Lent Philip’s Reflection: “The Two Brothers” (Luke 15:11-32) 2022년 3월 27일 일요일 – 사순절 네 번째 주일 말씀제목: “두 형제”(눅 15:11-32)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시 19:14) 우선 예수님이 전해주신 가장 긴 비유인 이 이야기를 아름답게 읽어준 메리에게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아주 많이 들어왔지만 메리처럼 읽었을 때 우리는 새로운 특징을 듣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역대 가장 훌륭한 단편 이야기”라고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이 비유가 누가복음에서만 쓰여 있어서 “복음서 안의 복음”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물론 이 이야기가 등장한 1세기 후반 이래로 음악과 미술, 문학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대표작은 오늘 주보 앞 표지에 있는 그림입니다. 지금은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소장된 램브란트의 유명한 그림입니다. 그리고 몇몇 분들은 아셨겠지만, 이 그림은 이 자체로 헨리 나우웬이 쓴 훌륭한 책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돌아온 탕자-귀향”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책은 제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라 저는 수십번도 더 이 책을 읽고 또 읽을 수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램브란트의 그림 제목일 뿐만 아니라, 이 비유에도 붙여진 전통적인 이름입니다. 이 이야기는 둘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시절에는 비록 권장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을 때 아들이 조기 유산 배분을 요구하는 것이 특이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보통 두 아들 중 차남은 유산의 삼분의 일을 받았고, 장남이 나머지 삼분의 이를 가져갔습니다. 이 문맥 상의 배경은 작은 농촌 마을로써 이 마을은 생계 유지를 위해 농사를 통한 소출을 통해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했고 아이들이 종종 경제적인 이유로 집을 떠나 일자리를 찾기 위해 마을을 떠나야 하는 환경이었을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참으로 이례적이자 무례하기까지도 한 것은 유산을 현금으로 나눠 달라는 요청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렇게 가족을 서둘러 떠나 이방인에게 고용되어, 종교 의식적으로 가장 정결하지 못한 동물인 돼지들에게 먹이를 주고 심지어 같이 먹기까지 했기에 처음 이야기를 들었던 이들에게 경멸과 깊은 수치심으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산을 날려버린 것에 대하여 누가는 이것을 “방탕한 생활”로 묘사하는데, 이제 비참한 배고픔과 빈곤, 기근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그가 스스로 왔다”라는 것을 듣게 됩니다. (킹 제임스 버전은 “그가 정신을 차렸다”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 청중들에게 모든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의 삶은 바닥을 쳤고, 그것이 자책감인지 절망의 외침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개입일지 회개인 것인지 본문은 의도적으로 모호하지만 중요한 요점은 바로 “그가 정신을 차렸다”는 것입니다. 절망과 임박한 죽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용돌이를 거슬러 “나는 다시 일어섰고 나의 아버지께로 간다”고 아들은 말하며, 이 이야기의 방향은 그가 가족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완전히 바뀝니다. 즉, 분위기가 수치심과 절망에서 희망과 용서로 전환된 것입니다. 이제 이야기의 초점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애절하게 기다리며 길을 내려다보는 아버지로 바뀌고 그가 아들을 보았을 때 “그는 연민에 가득차서 달려가 그의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맟췄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열려 있는 창문 옆에 앉아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었는지 모릅니다. 다시 아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며. 그러나 우리는 부모로써, 엄마 또는 아빠로써 아이가 집에 돌아왔을 때의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기쁨과 그에게 달려나가 껴안고 입맞추고 싶은 통제할 수 없는 충동은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렘브란트가 이 놀라운 그림에서 포착한 것은 이 순간, 이 시대를 초월하고 부드러운 순간으로 그 장면을 포착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옷은 누더기에 신발은 한 짝이 사라졌고, 머리는 그의 아버지의 가슴에 파묻혔습니다. 걱정으로 이제 늙어버린 아버지는 그의 손을 아들의 어깨에 얹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가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오고, 새 신발을 신기고, 그의 손에 반지를 치장해줄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기념으로 영광스러운 손님이 도착할 때 치렀던 것처럼 큰 잔치를 준비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등장하지 않는 다른 등장 인물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어둠에 가려 있나 봅니다. 예를 들자면 아들의 엄마나 여동생이 배경에 있을까요? 그러나 다른 등장 인물을 램브란트는 밝게 비췄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두 아들에 대한 예화를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형제가 돌아왔을 때 장남은 들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램브란트는 그를 이 장면 속으로 데려왔고 우리가 세심하게 살펴본다면 이 장남의 포즈와 표현에서 소외되고 거만하며 분별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네, 아마도 유산상속의 계획이 오래 전에 잃어버린 형제의 갑작스러운 재등장에 의해 갑자기 뒤집혔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좀더 의문을 가져본다면,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런 캐릭터를 묘사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축하 만찬을 빠져나와 장남을 찾아 “그를 변호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고 분노한 장남은 아버지께 불만을 토로하며 “나는 그동안 몇 년 동안이나 당신을 위해 ‘노예처럼’ 일했습니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에게 불순종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 작은 염소 하나조차 제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심지어 아버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돌아온 저 녀석에게 살진 소를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도대체 정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그 아이보다 더 대접받을 자격이 없습니까? 아버지, 당신은 스스로를 어리석게 행동하셨습니다, 둘째는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소원하고 자격을 따지는 부자관계를 볼 때 그 아들이 그의 형제를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 아는 척을 하거나 인사하기를 거부하는 면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말에서 화해에 대한 동일한 열망과 이미 작은 아들에게 쏟아준 무조건적인 사랑을 듣습니다. “아들아,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한다. 그리고 내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축하하고 기뻐해야 한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생명으로 돌아왔다; 그를 잃었으나 다시 찾았다.” 그리고 우리에겐 질문이 남습니다. 장남에게도 잃었다가 다시 찾게 된 것이 있을까요? 그는 들에서 돌아와 그의 형제의 귀향을 축하하러 갔을까요? 물론 우리는 답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이 비유가 뻔뻔하게 유산을 요구하고 그 유산을 모두 날려버리고, 정신 차리고 돌아와 용서를 구하던 어린 아들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충실한, 그리고 가족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던 형제에게 베푼 아버지의 대접에 분개하였으며, 상속받을 유산의 가치가 줄어들게 된 자격을 가진 장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네, 이 이야기는 잃어버린 두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화는 그 이상을 보여줍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정말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관대함으로 때로는 순진함으로 재산의 삼분의 일을 떼어 주고도 창문에서 먼 땅에서 돌아올 아들의 귀향을 그리워하는 부모, 그리고 “연민에 가득 차”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달려나가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용서해주며, 아들의 귀환을 축하하며 성대한 잔치를 여는 아버지 말입니다. 그리고 소외된 장남에게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한다. 그리고 내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라고 말해주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들 사이의 화해를 추구합니다. 저는 이 예화 속 정의를 사랑합니다. “절대 일어나진 않겠지만 언제나 통하는 이야기”라는 존 도미닉 크로산의 말처럼 1세기의 청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여전히 설득력 있는 오늘날의 복음 이야기같이 시대를 초월한 본질을 보여줍니다. 또한 램브란트가 보여준 것처럼 미술, 음악, 심리학(형제간의 경쟁에 관한 연구로서), 그리고 신학적으로(죄악, 소외, 회개, 긍휼, 용서, 신성한 사랑, 자격, 시기심 등) 그리고 다른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이 주제를 인지하고, 각기 다른 이 세 캐릭터의 여러 측면에 대해 인식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마지막 생각을 여러분께 남기려고 합니다. ‘방탕한’의 사전적 의미는, 최소한 성경적 용어 안에서, “성급하게 또는 낭비적으로 사치스럽다”는 것입니다. 네, 우리는 그가 가진 모든 돈을 사치로 다 소진해버린 둘째의 행동에서 이 의미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의 도덕적 의미에 대해 이해하고, 주보 앞면이 그림 속에 이것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제안한 것처럼, 이 탕자에 대한 비유는 아버지와 잃어버린 두 아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들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매우 “낭비적으로 사치스럽고”, 무조건적이며 아주 성급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이야기를 “탕자 아버지의 비유” 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두 아들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매우 좋은 소식이 될 것입니다. 아멘.
By Philip Francis 30 Mar, 2022
Sunday, March 20th, 2022 – Third Sunday in Lent Philip’s Reflection: “Green Shoots” (Luke 13:8) 2022년 3월 20일 일요일 – 사순절 세 번째 주일 말씀제목: “푸른 새싹”(누가복음 13:8)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 19:14) 아멘 우리는 요즘 매일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전쟁의 영향과 무고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인류의 잔혹성에 대한 흔적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일 아침 예배에서 더 언급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두려운 이미지가 넘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이 안전하게 성소에서 나갔으므로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읽은 다른 아이를 언급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따라갔던 몇몇 사람들이 유대의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끔찍한 의식으로 보이는 일에서 처형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해 그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사람이신 예수님은 그들 마음속에 있는 진짜 질문을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들이 죽어 마땅하다고 제안하는 것입니까?" (눅 13:2).라고 말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본디오 빌라도가 그들에 대한 일종의 하느님의 심판 도구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아니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저희와 같이 멸망하리라”는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눅 13:3). 그리고 그들이 요점을 놓치면-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또 다른 질문을 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의 망대가 무너져 죽임을 당한 18명의 무고한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악행하였습니까?”( 눅 13:4)-그들이 몇 분, 몇 시간, 며칠 전에 그 자리를 지나던 수백 명의 사람들보다 더 죽을 자격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저희와 같이 멸망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목회자로서 저는 이와 유사한 어려운 질문을 받는 상황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할 수 있었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모두 거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한 대답은 틀림없이 "모른다"라는 유일한 대답일 것이다. 성경 말씀 가운데는 자세한 설명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고는 어디서나 어느때나 발생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자애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이 그런 비극을 일으키리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침묵과 임재와 자비만이 유일하게 적절한 대응입니다. 우리는 나쁜 사람들의 행동을 제외하고는 왜 나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의 메시지는 하나님도 고통을 당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와 슬픔과 고통을 담당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하거나 위험한 행동의 비극적 결과이든, 우연한 비극과 무고한 손실의 시기에 답할 수 없는 질문이든, 예수님은 "아니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이러한 일을 당할 이유가 없었고,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나 고통받거나 죽는 사람들을 심판하거나 벌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상을 주시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통제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과 생각하는 방식만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큰 비극이나 인도주의적 재난의 상황에서 우리는 회개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타락과 수천, 수백만의 무고한 일반인을 공포에 떨게 하고 이주시키기 위한 현대 군사 무기의 충격적인 폭력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은 "아니오"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개인, 도시 및 국가와 세계 질서로서 우리가 폭력에서 돌아서지 않는 한 우리도 비슷한 운명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다음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를 갖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회개는 어떠한 모습이어야 할까요?” 문제의 규모가 너무 커 보이는데 눈앞에 펼쳐진 인도적 재난에 대해서 평화와 긴장완화에 어떻게 기여해야 할까요? 그리고 아마도 우리는 몇 주 전에 St. David가 상기시켰듯이 “작은 일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개별적으로, 그리고 나서 공동체로서, 그 다음에는 국가로서 변화를 가져와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슬픔이나 상실, 고난에 직면했을 때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기도로 시작해야합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님께서 함께 걷던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뒤에 숨겨진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3년 동안 주인은 “이 무화과나무에서 실과를 구하려고”(눅 13:8)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찾지 못했을 때마다 완전히 메마르고 푸른 무화과가 보이지 않아 답답하여 정원사에게 명령했습니다. "베어버려" – 무화과나무가 심어진 토양을 낭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확실히 우리는 더 좋고 더 유익한 것을 재배하기 위해 그 토지를 더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들은 대로 정원사는 주인에게 나무에게 1년만 더 시간을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는 흙을 풀고 비료를 준 다음 “내년에 열매를 맺으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다음에 베어버릴 수 있습니다.” (눅 13:9) 우리는 사순절 성경 연구에서 이 비유에 대해 활발한 토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추종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런 조급함을 나타내는 소유자, 성급하고 판단력이 강하고 편협한 사람; 그리고 정원사, 참을성, 희망이 있는, 무화과나무를 위해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옹호자; 그리고 우리는 무화과나무 자체, 즉 좋은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있는 이 식물, 즉 무성하고 비생산적인 이 식물을 어떻게 만들 수 있습니까? 그것이 무화과나무의 잘못일까요, 아니면 토양의 품질이 좋지 않은 이유 때문일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물이 충분하거나 관심이 부족해서입니까? 이전과 마찬가지로 쉬운 답은 없으며 우리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대본에 쓰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날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좌절에 직면하여 인내심을 잃고 욕망을 잃는 편협한 소유자의 예를 찾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내 과일을 얻을 수 없다면 나무에 도끼를 들고가서 그것을 자르고 싶어한다면, 나는 그것을 파괴하고, 납작하게 만들고, 그것을 땅으로 가지고 가서 뿌리를 파내고 다시 심을 것입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비유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데, 그 비유가 정원사에 관한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특히 방금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에 관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원사는 나무를 판단하거나 비난하거나 벌을 주지 않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잘못이 아니지요. 인내심을 갖고, 약간의 사랑을 보이고, 잡초를 제거하고, 비료를 뿌리고, 물을 좀 더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나무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더 주고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아마 내년이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힘든 겨울을 보냈기 때문에, 그리고 인내심을 잃기 쉽고, 메마름의 시간이 여러 달 동안 지속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마도 지난 2 년 동안 지속된 것 같은데요. 이 지역 사회에도 힘든 겨울이었고, 우리는 봉쇄와 외로움의 영향을 느꼈고 방향감각이나 목적의식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계적인 대유행의 겨울에서 벗어날 때에도 우리의 세계는 다시 한번 혼란과 불확실성에 빠져든다. 그러나 봄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과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며, 우크라이나와 다른 전쟁 지역의 이미지가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증거를 볼 때이며, 우리는 이전에 들었던 시편 기자의 말로 "오 하나님 ...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수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한 진달래와 수선화와 개나리의 첫 번째 색깔 인 봄의 첫 번째 녹색 싹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이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징조, 새로운 성장 잠재력의 증거, 뿌리가 깊은 공동체, 세계적인 전염병의 불모의 겨울에서 살아남은 공동체입니다. "주인이여,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저는 거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시간을 내어 땅을 파고 가지를 치고, 무화과나무가 아름답고 열매가 많은 나무, 아무도 베어낼 꿈을 꾸지 않을 나무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By Philip Francis 18 Mar, 2022
2022년 3월 13일 일요일 – 사순절 두 번째 주일 말씀제목: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며”(시 27:13)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시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책 중 한권이며 되도록이면 매 주일 아침 예배에 시편 중 하나를 포함하려고 합니다. 저는 시편을 사랑하며 시편의 말씀은 결코 제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내 침대 곁에는 기드온에서 발행한 시편이 포함된 작은 신약성경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교회 사무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1년 중 각 요일의 시편 구절과 짧은 기도문이 담긴 작은 플립 달력입니다. 아시다시피 시편은 150편의 시들로 구성된 성경에서 가장 긴 책으로, 기원전 4~5세기에 수집되고 편집된 고대 이스라엘의 찬송과 기도의 모음집입니다. 시 모음집이라는 명칭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고난의 때에 신의 도움을 구하는 탄식이나 호소, 신뢰 또는 감사의 노래, 왕의 시와 찬양의 찬송을 포함하여 다양한 유형의 시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시편 27편과 같이 시편들 중에 어떤 시는 하나의 시편에 여러 유형이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시편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개인 또는 공동 기도를 포함하여 때때로 예배나 지혜나 교훈의 원천으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예배에 사용하기 위해서 또는 개인적인 헌신이나 영감의 원천으로서 오늘날에도 가치가 있을 만큼 시대를 초월한 값어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시편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시편을 자주 연구하고 암기하고 묵상하셨으며, 예수님의 경우 시편은 (시편 118편의 말씀에서처럼)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시편 118편의 말씀에서)와 같이 자신의 자기 이해의 중심이었습니다. 시 118:22, 마 21:42). 성금요일 십자가에서 버림받고 고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시편 22편의 말씀으로 부르짖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 22:1, 마 27:46).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며 시편 31편 5절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시편을 예수님이 사랑하시고 기도하신 기도들로써 생각하며, 그 생각이 이러한 시기에 힘과 위안을 주는 큰 원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와 같은 기도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졌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불의나 폭력에 직면했을 때, 또는 우크라이나의 도시와 마을, 인구밀집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과 포격에 직면했을 때, 이제 온 가족, 전체 공동체가 포탄과 순항 미사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고자 방공대피소에 모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행하셨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무엇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까? 글쎄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실 한 가지 일이 의식적인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매일 또는 일요일의 일상처럼 우리가 눈을 감고 친숙하거나 위안이 되는 곳에서 함께 주기도문을 할 수 있을 때 기도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배웠던 단어지만, 마치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기도하고 목요일 저녁에 기도회로 모였던 것처럼 함께 기도합니다. 우리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이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와 함께 기도하실 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거룩한 중재자요 대변자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더 분명하게 들으심을 믿습니다. 나는 예수께서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해 시편 27편의 말씀을 기도하기를 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편은 개정된 공동 성서일과표에 의해 이번 주일에 정해진 말씀 본문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위해 쓰여졌을 수도 있는 시편이기 때문입니다. TV 화면의 충격적인 이미지를 통해, 그리고 우리가 보고 듣는 섬광과 불길을 통해 이 참혹한 재난을 대리로 경험하는 전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우리에게 그것이 전해지듯이 오늘의 말씀이 그들에게 약간의 위로와 힘을 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포탄의 공격에서 오는 연기, 그리고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피난처를 찾거나 산부인과 병원에서부터 부상을 입어서 Odessa 또 Makariv 또 Mariupl and, 수도 Kyiv를 떠날 수 조차 없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또한 두려움과 고통을 우리는 봅니다. 그리고 바로 시편 27편의 시작 부분에서 바로 우리는 이 심오한 신뢰의 선언을 듣습니다. 환난이나 절망의 때에 모든 것이 어둡게 보일 때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그런즉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그리고 우리는 “주님은 내 삶의 요새이십니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27:1).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진술이 아닙니다. 캐나다 헌법에 기초가 된 권리 및 자유 헌장에서 찾을 수 있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나의 빛과 구원, 나의 삶의 요새가 되십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큰 위안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이러한 신뢰, 즉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느낌입니다. 계속 읽어봅시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그리고)“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그래도 나는 확신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으며 우리가 상실, 불필요한 고통 또는 개인적인 좌절을 겪을 때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다는 확신, 또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을 잃기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멀리 계시거나 부재하거나 더 나쁘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탄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시편 130편에서)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님, 제 목소리를 들으소서!”(시편130:1-2) 그리고 시편 88편에서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소서”(시 88:1-2). 그리고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똑같은 버림받은 느낌을 경험하시는 것을 들었고, 오늘 우리의 복음서 본문을 통해 그것을 다시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운명에 있는 거절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한탄하실 때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 내가 얼마나 자주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네 자녀를 모으려 하여도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병아리를 보호 날개 아래 모으는 암탉의 형상보다 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슬픔이나 두려움이나 절망의 때에 우리가 “오 주여, 내가 소리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시 27:7)라고 탄식하며 우리가 근심스럽게 부르짖을 것이라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가리우지 마소서...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를 내버려두지 마소서" 그리고 이 절망 가운데, 즉 자기 의심 속에서 시편 기자는 다시 돌아서서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위해 구원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들로 말미암아 나를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내 원수의 뜻에 나를 굴복시키지 마소서. [거짓말쟁이들]과 거짓 증언자들이 일어나 나를 대적하여 강포를 내뱉습니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라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27:13).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며,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우크라이나와 지구상의 다른 전쟁 지역에 먹구름이 드리우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굳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미 우리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신뢰에서 탄식과 절망에 이르기까지 구원을 위한 기도와 회복된 믿음에 이르기까지 시편의 이 작은 보석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시편말씀은 그 자체로 크게 증언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한 구절이 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로 기도하실 때, 심지어 지금 우크라이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또한 시편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었는데요. 그 말씀은 바로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 27:14). 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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