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Philip Franc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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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30, 2022
Sunday, March 27th, 2022 – Fourth Sunday in Lent Philip’s Reflection: “The Two Brothers” (Luke 15:11-32) 2022년 3월 27일 일요일 – 사순절 네 번째 주일 말씀제목: “두 형제”(눅 15:11-32)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시 19:14) 우선 예수님이 전해주신 가장 긴 비유인 이 이야기를 아름답게 읽어준 메리에게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아주 많이 들어왔지만 메리처럼 읽었을 때 우리는 새로운 특징을 듣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역대 가장 훌륭한 단편 이야기”라고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이 비유가 누가복음에서만 쓰여 있어서 “복음서 안의 복음”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물론 이 이야기가 등장한 1세기 후반 이래로 음악과 미술, 문학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대표작은 오늘 주보 앞 표지에 있는 그림입니다. 지금은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소장된 램브란트의 유명한 그림입니다. 그리고 몇몇 분들은 아셨겠지만, 이 그림은 이 자체로 헨리 나우웬이 쓴 훌륭한 책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돌아온 탕자-귀향”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책은 제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라 저는 수십번도 더 이 책을 읽고 또 읽을 수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램브란트의 그림 제목일 뿐만 아니라, 이 비유에도 붙여진 전통적인 이름입니다. 이 이야기는 둘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시절에는 비록 권장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을 때 아들이 조기 유산 배분을 요구하는 것이 특이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보통 두 아들 중 차남은 유산의 삼분의 일을 받았고, 장남이 나머지 삼분의 이를 가져갔습니다. 이 문맥 상의 배경은 작은 농촌 마을로써 이 마을은 생계 유지를 위해 농사를 통한 소출을 통해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했고 아이들이 종종 경제적인 이유로 집을 떠나 일자리를 찾기 위해 마을을 떠나야 하는 환경이었을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참으로 이례적이자 무례하기까지도 한 것은 유산을 현금으로 나눠 달라는 요청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렇게 가족을 서둘러 떠나 이방인에게 고용되어, 종교 의식적으로 가장 정결하지 못한 동물인 돼지들에게 먹이를 주고 심지어 같이 먹기까지 했기에 처음 이야기를 들었던 이들에게 경멸과 깊은 수치심으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산을 날려버린 것에 대하여 누가는 이것을 “방탕한 생활”로 묘사하는데, 이제 비참한 배고픔과 빈곤, 기근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그가 스스로 왔다”라는 것을 듣게 됩니다. (킹 제임스 버전은 “그가 정신을 차렸다”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 청중들에게 모든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아들의 삶은 바닥을 쳤고, 그것이 자책감인지 절망의 외침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개입일지 회개인 것인지 본문은 의도적으로 모호하지만 중요한 요점은 바로 “그가 정신을 차렸다”는 것입니다. 절망과 임박한 죽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용돌이를 거슬러 “나는 다시 일어섰고 나의 아버지께로 간다”고 아들은 말하며, 이 이야기의 방향은 그가 가족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완전히 바뀝니다. 즉, 분위기가 수치심과 절망에서 희망과 용서로 전환된 것입니다. 이제 이야기의 초점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애절하게 기다리며 길을 내려다보는 아버지로 바뀌고 그가 아들을 보았을 때 “그는 연민에 가득차서 달려가 그의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맟췄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열려 있는 창문 옆에 앉아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겨 있었는지 모릅니다. 다시 아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며. 그러나 우리는 부모로써, 엄마 또는 아빠로써 아이가 집에 돌아왔을 때의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기쁨과 그에게 달려나가 껴안고 입맞추고 싶은 통제할 수 없는 충동은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렘브란트가 이 놀라운 그림에서 포착한 것은 이 순간, 이 시대를 초월하고 부드러운 순간으로 그 장면을 포착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옷은 누더기에 신발은 한 짝이 사라졌고, 머리는 그의 아버지의 가슴에 파묻혔습니다. 걱정으로 이제 늙어버린 아버지는 그의 손을 아들의 어깨에 얹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가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오고, 새 신발을 신기고, 그의 손에 반지를 치장해줄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기념으로 영광스러운 손님이 도착할 때 치렀던 것처럼 큰 잔치를 준비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등장하지 않는 다른 등장 인물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어둠에 가려 있나 봅니다. 예를 들자면 아들의 엄마나 여동생이 배경에 있을까요? 그러나 다른 등장 인물을 램브란트는 밝게 비췄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두 아들에 대한 예화를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형제가 돌아왔을 때 장남은 들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램브란트는 그를 이 장면 속으로 데려왔고 우리가 세심하게 살펴본다면 이 장남의 포즈와 표현에서 소외되고 거만하며 분별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네, 아마도 유산상속의 계획이 오래 전에 잃어버린 형제의 갑작스러운 재등장에 의해 갑자기 뒤집혔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좀더 의문을 가져본다면,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런 캐릭터를 묘사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축하 만찬을 빠져나와 장남을 찾아 “그를 변호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고 분노한 장남은 아버지께 불만을 토로하며 “나는 그동안 몇 년 동안이나 당신을 위해 ‘노예처럼’ 일했습니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에게 불순종하거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 작은 염소 하나조차 제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심지어 아버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돌아온 저 녀석에게 살진 소를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도대체 정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그 아이보다 더 대접받을 자격이 없습니까? 아버지, 당신은 스스로를 어리석게 행동하셨습니다, 둘째는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소원하고 자격을 따지는 부자관계를 볼 때 그 아들이 그의 형제를 ”잃어버린” 것으로 여겨 아는 척을 하거나 인사하기를 거부하는 면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말에서 화해에 대한 동일한 열망과 이미 작은 아들에게 쏟아준 무조건적인 사랑을 듣습니다. “아들아,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한다. 그리고 내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축하하고 기뻐해야 한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생명으로 돌아왔다; 그를 잃었으나 다시 찾았다.” 그리고 우리에겐 질문이 남습니다. 장남에게도 잃었다가 다시 찾게 된 것이 있을까요? 그는 들에서 돌아와 그의 형제의 귀향을 축하하러 갔을까요? 물론 우리는 답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이 비유가 뻔뻔하게 유산을 요구하고 그 유산을 모두 날려버리고, 정신 차리고 돌아와 용서를 구하던 어린 아들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충실한, 그리고 가족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던 형제에게 베푼 아버지의 대접에 분개하였으며, 상속받을 유산의 가치가 줄어들게 된 자격을 가진 장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네, 이 이야기는 잃어버린 두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화는 그 이상을 보여줍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정말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관대함으로 때로는 순진함으로 재산의 삼분의 일을 떼어 주고도 창문에서 먼 땅에서 돌아올 아들의 귀향을 그리워하는 부모, 그리고 “연민에 가득 차”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달려나가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용서해주며, 아들의 귀환을 축하하며 성대한 잔치를 여는 아버지 말입니다. 그리고 소외된 장남에게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한다. 그리고 내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라고 말해주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들 사이의 화해를 추구합니다. 저는 이 예화 속 정의를 사랑합니다. “절대 일어나진 않겠지만 언제나 통하는 이야기”라는 존 도미닉 크로산의 말처럼 1세기의 청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여전히 설득력 있는 오늘날의 복음 이야기같이 시대를 초월한 본질을 보여줍니다. 또한 램브란트가 보여준 것처럼 미술, 음악, 심리학(형제간의 경쟁에 관한 연구로서), 그리고 신학적으로(죄악, 소외, 회개, 긍휼, 용서, 신성한 사랑, 자격, 시기심 등) 그리고 다른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이 주제를 인지하고, 각기 다른 이 세 캐릭터의 여러 측면에 대해 인식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마지막 생각을 여러분께 남기려고 합니다. ‘방탕한’의 사전적 의미는, 최소한 성경적 용어 안에서, “성급하게 또는 낭비적으로 사치스럽다”는 것입니다. 네, 우리는 그가 가진 모든 돈을 사치로 다 소진해버린 둘째의 행동에서 이 의미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의 도덕적 의미에 대해 이해하고, 주보 앞면이 그림 속에 이것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제안한 것처럼, 이 탕자에 대한 비유는 아버지와 잃어버린 두 아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들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매우 “낭비적으로 사치스럽고”, 무조건적이며 아주 성급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이야기를 “탕자 아버지의 비유” 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두 아들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매우 좋은 소식이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