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5, 2021 "The Other" Rev. Dal McCrindle요즘은 많은 교회들이 선한 목자 주일을 기념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시편 23편을 봉독하거나 노래로 부르고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예수님은 선한 목자라는 부분을 말합니다.그 말씀들에 따르자면 아주 옛날에는, 1세기에,양떼를 치던 시기였으니 예수께서 그 자신을 양떼를 치는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경제 사정에 따라서 양을 치는 것을 직업으로 해서 목동으로 구분 할 수도 아닐 수도 있겠으나 양들은 목자의 말에 순응하고 양들이 목동으로 믿고 따르게 됩니다. 최소한 누가 자신들을 돌보는지는 안다는 것입니다.이 말씀이 의미 하는 우리는 목동을 따르는 양들이 똑똑 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대개는, 양들이 어리석다고 알고 있습니다; 안으면 귀엽겠다 싶기도 합니다. 특히 어린 양들이 때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어리석음의 정도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만.양이라는 것이, 참으로 그들의 목자 만을 의지하고요. 또한 양을 지키는 일이 참으로 수고로운 일들이 어마어마 합니다. 양을 비유해서 말씀을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양들의 어리석음을 생각해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지를 알 수 있습니다.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이 사람을 지키시는 목자 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 젊은 시절 다윗이 고백한 말 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자에 비유 되던 일은 오래 전 부터 있었으며 이는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어느 누구라도 좋은 목자와 그렇지 않은 목자를 구분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목자와 함께 있는 양들은 생육합니다. 그렇지 않은 목자와 있는 양들은 살아가는 일이 고단하지요 배도 곯는 일이 있습니다. 좋은 목자는 목자가 할 일이 무엇이며 양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지를 압니다. 돈만을 생각하는 일꾼들은 양들을 지키는 주인들 처럼 성실하게 일을 하지 않습니다. 목자들은 저녁에 우리를 열어둡니다. 그리고 양들이 안전 하도록 밤새 지킵니다. 목자들은 양들이 가야 할 곳을 안내하고 양들은 그들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압니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따릅니다. 왜냐하면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그들의 목자가 아닌 목소리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예수께서는 이 점을 우리들에게 말씀 하십니다. 우리의 목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요. 양들은 그들의 목자에게 세밀하게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러기에 목자들은 그들의 삶을 희생하면서 그들에게 집중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양들을 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노략질 하던 도둑이나 강도와 같았던 목자가 아니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양떼라면 어떤 목자를 원하십니까?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분 예수님이시잖아요.이스라엘은 수 백 년간 양과 목자의 이미지를 사용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지키시는 것을 말해왔습니다. 에스겔에 보면; 선지자가 기록하기를, “너 목자야, 들어라,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나의 양들이 맹수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잡아 먹혔다. 왜냐하면 그들을 지킬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양떼를 지키고자 하는 선한 목자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을 돌봐왔다. 나 하나님이 나의 양을 지킬 것이다 너는 다시는 그들의 목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자의 이미지로 이해해 왔습니. 예수께서는 전통적으로 그렇게 암시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자들 가운데에는 나쁜 목자도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닙니다. 그분은 양떼를 지키는데 온 힘을 다 쏟아오셨습니다. 어려운 상황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예수께서는 도망가지 않으셨습니다. 어려움이 다가오면 돈으로 그 어려움에서 자신들을 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선한 목자는 우리를 지키며 위험한 상황과 마주 하였습니다. 본인들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의 양의 생명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생명들입니다! 선한 목자는 경제적인 상황에 따라 양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는 그들의 양을 압니다 그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습니다.양떼들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그로 인해 어려운 일을 당하여 큰 용기를 내야 할 순간에 왔을 때를 말씀 하시기를 그들은 더이상 그의 양떼가 아니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양떼는 더이상 그이 목자의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 양떼들의 들은 목소리에 응한 행동은 그를 잡으라 했으며 돌로 치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셨지요.비록 우리가 양들에 대해 잘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는 양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우리는 시편 23편을 좋아하지요. 우리를 지키시는 목자가 계심으로 우리를 안심시켜주는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예수께서 어려운 상황에 우리를 지키시기 위하여 일하시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도둑이나 강도로 부터 양의 우리를 열기도 닫기도 하시는 것을 좋아 합니다. 그 분은 우리를 잘 아시니까요. 그 분은 저녁에 양의 우리를 어떻게 단단히 해야 하는지를 아시니까요. 하나님께 감사하지요. 우리에게 선하신 목자를 허락하시고 우리를 지키시며 언제나 우리의 생명을 위험으로부터 지키주셔서요. 얼마나 우리를 마음을 안심 시키는지 모릅니다. 안전하게 또 사랑 받고 있음을 느낍니다.우리는 예수님께 돌봄을 받으면서 우리들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론 말씀도 하셨습니다. “저기 다른 나의 양 무리에 속하지 않는 다른 양떼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나의 양 무리로 데리고 와 나의 말에 순종하도록 해야한다.”우리가 무엇인가가 정말 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생각에 집중해 주십니다. 누군가를 찾는 것에서 우리들의 필요에 집중 해주시지요. 그러면 누가 다른 이들일까요? 티비에서 방영 되었던 공상과학 영화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소명은 세상 곳곳을 다니며 사역 하는 것 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노력은 다른 이들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져야 하는 일이었으며 “다른 이들” 이라는 말은 박해 받고 부당한 대접을 받으며 결국은 미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입니다. 인종이나 종교 문제로 인해 일어났던 수많은 전쟁들로 그 값을 치렀습니다-선한 목자라는 이름 아래에서 평화의 왕,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라는 이름으로 처참한 잔혹 행위가 벌어졌었습니다.연구에 따르면 이민자들이나 방문객들이 교회에 방문 하면 대략 12분간 교회에 머문다고 합니다. 그들이 다시 교회를 다시 방문 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 연구 결과에 따르자면 이민자들이 교회를 방문 한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로써 존경받아 마땅한 일로 여긴다 합니다.현대 전형적인 캐네이디언 가정의 모습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모습 이라고 합니다. 엄마 아빠는 이른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고, 6시 전에 아이들 아침을 준비하고, 방과후 아이들을 돌봐 주는 곳에서 데리고 오고, 회의를 마치고, 저녁 운동을 하고 10시 30분, 11시 혹은 12시나 되어야 잠자리에 든다고 합니다. 다음 날이면 또 그 생활이 반복이 되구요. 대개의 부모들은 한가지 이상의 직업을 가져서 그들의 경제적인 필요를 맞추고 살며 아이들이 교육을 잘 받고 모범 시민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 아이들이 활동하는 시간 동안에는 잘 짜여진 계획에 의해 모든 교육을 받게 하게 있다고 합니다. 음악교육, 운동, 사회 활동을 잘 하도록 기회를 부여하고 학교 수업을 잘 따라가게 하기 위하여 개인 교습을 받고 최소한 지역 사회에 있는 대학에라도 들어 가게 하려고 뒷받침을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이 다가는 주말이면 드디어 지난 6일간의 힘든 시간을 쉴 수 있는 잠을 잘 수 있다는 것 입니다. 그런 사람들 중 어느 한 사람이 갑자기 말하지요, “교회 갑시다!” 어떤 생각이 들게 했던; 어떤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강타했건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른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찾으시고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요-어쨋거나 말이지요.어떻게 그들을 환영 받을 수 있을지요. 그들은 집과 같이 안전하게 느낄 수 있는 초장을 찾을 수 있을 까요? 사람들은 수많은 방법으로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시편 23편은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수 많은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야 할 것 입니다. 어느 한 곳도 하찮은 골짜기가 아닙니다. 생명을 위협 하는 골짜기 일 수도 있고 죽음의 수풀도 있으며 무엇인가를 잃어 버리는 곳도 있습니다; 직업, 우정, 식구 간의 불화, 결혼의 문제, 약물 중독, 사람들로 부터 오는 위협 이 모든 것들은 상처를 남길 것이고 두려움이 가득하게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이 이런 경험을 하는 동안 어두은 계곡을 지나게 되겠지요. 때론 그들은 목소리를 듣게 되겠지요, 아마도 작은 소리 이겠지만; 혹은 그들의 지난 기억 속에 그들의 권고해서 목자를 찾게 하거나 안전한 장소를 찾거나 평안한 곳을 찾고 그들의 삶을 지속할 장소를 찾을지 모릅니다.만약 믿지 않는 사람들은요? 아니면 무엇인가를 더 넓게 인해 한다면요? 예수께서는 오직 한 길만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요, 그를 통하여 믿는 것이요?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 목자 예수님의 음성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올 수 없다는 말씀이 아닌가요? 아니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 주목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말씀 아닐까요? 만약 우리가 예수께서는 성육신 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목자로서 말씀 하십니다, 자연스레, 이성적으로요. 아무튼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신다는 것이지요. 아무도 내게 올 자가 없다, 내가 너희를 이끌기 전까지는 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이런 것 이지요. 어떤 이가 나서서 교회 갑시다 라고 말하는 것이요. 그 말씀이 들리면 양떼들은 따라 옵니다.다른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올 것이지만 또 다른 이들은 다른 곳으로 가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같은 사람들이거든요. 우리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답을 했고 그 답에 따라 우리는 여기에 왔습니다. 양을 치는 이 들판에 말입니다.우리는 거기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다른 무리의 사람들이요, 다른 이들의 미래-다음 세대들이요. 예수님의 목소리를 따르는 사람들로 우리는 소명을 받고 선함 목자의 인도 하심을 따라 삽니다. 당연히 돈을 쫓으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께서 비난하시며 그들을 돌보시지 않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고 하십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 하신 영으로 거하십니다.이것이 저의 신앙 고백입니다!
St. David's United Church, West Vancou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