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 2021 "This is a Desert Road" Rev. Dal McCrindle우리들 대부분은 잠자기 전에 듣는 배드 타임 스토리를 듣고 자랐을 것 입니다. 그 이야기들이 주는 것은 아이들에게 교훈이 되는 도덕과 지켜야할 것들에 관한 것들이지요. 잠자리에서 듣는 그 이야기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것이 무엇이 공평한 일인지, 어떤 일이 친절한 행동인지 무엇이 사랑이고 혹은 나쁜 것인지를 알게 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을 어렸을 때 부터 듣고 자랐습니다만 어른이 되고 나서도 우리는 성경을 보며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 그분의 가르침 왕들과 나라들에 대한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가르침을 따릅니다.주교 존 스퐁 쓴 도발적인 책들에서 성경 말씀을 현대의 우리시대에 맞는 말씀으로 연결시키려 했었습니다. 그는 히브리 미드라쉬(성서를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이 “현재” 를 사는 세대들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관하여 삶의 지침이 되는 가르침을 써놓은 책)의 주제를 설명하거나 조사하면서 오래 전의 성서를 해석 하던 법과 그것으로 옛 사람들의 신앙적인 기록을 설명하고 이를 통하여 지금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이해와 경험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이스라엘을 보면,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 였습니다. 그의 지도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예살이에서 해방 시켰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으로 올라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는 계명을 받았고 먹을 것을 제공하였으며 광야 생활에서 사람들을 치료 하였습니다. 만약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특별하고도 극적인 일들에 대해 믿는다면, 그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것들이 바뀔 것입니다. 왜 그들이 그들의 구원의 메시아로, 탈출하게 하신 분으로, 노예의 생활에서 죽음에서 구해 내신 분으로 말하고자 했는지를 아는 것은 쉽습니다. 예수께서 거룩한 언덕에서 설교하시고 가르치셨을 때, 잔치에서 모든 이들을 다 먹고도 음식이 남았을 때; 병으로 고통 받던 사람들이 고침을 받고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를 나누며 그리고 드디어 모세나 엘리야처럼 하나님 안으로 들어 가는 거지요… 이것이 미드라쉬 입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모세나 엘리야, 다윗, 아담에 이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 하는 아들이며 심지어는 하나님 자신이라 하셨지요.미드라쉬는 히브리의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크리스천의 이야기로 우리가 듣고 자랐던 이야기 만큼이나 가치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가르침이나 도덕 우리들이 믿는 믿음에 대해 신앙으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말씀 입니다.사마리아에서 활발하게 전도하고 있는 빌립, 어느 날 그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빌립아, 너는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가사는 이스라엘 영토가 아니라, 블레셋의 대표적인 거주지입니다. 그 책의 저자는 짧은 말씀을 써 넣었는데 이 말씀은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요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길은 사막 (광야) 이다. 여러분 중에 어느 누구라도 팔레스타인의 지리를 좀 아신다면 그 길은 광야의 사막 길이란 걸 아실 것입니다 … 그런데 필립이 말한 사막을 보겠습니다: 사막에서 필립은 이디오피아여왕 캔디스의 시종인 이디오피아인 환관을 만났습니다. 빌립은 가사에 갈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길은 광야 길입니다. 무척이나 걸어가기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기에 빌립은 두 말없이 순종하여 가사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도중에 에티오피아 사람을 한 사람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에티오피아 여왕 캔디스의 고관으로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내시였습니다. 비록 에티오피아 사람이었지만, 그는 진지한 태도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이름 없는 이디오피아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다녀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길을 멈추고 길 가에 서서 경건하게 이샤아서를 읽었습니다. 빌립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 이디오피아 사람과 말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말씀을 이해 하십니까?” 그는 빌립에게 자기 곁에 앉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날 그 사람, 내시가 읽고 있던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도살장으로 향하는 양처럼 끌려갔고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처럼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을 당하며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해 이 땅에서 그의 생명을 빼앗겼으니 누가 이 세대의 악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사야 53:7-8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받으시는 모습을 예언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내시는 빌립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여기 기록된 이 말씀은 누구를 두고 한 말입니까? 예언자 자신을 두고 한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빌립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해 주었습니다.빌립은 자신이 경험한 예수님을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좀 더 같이 계속 여행을 이어 나갔습니다. 이들은 마침 물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함께 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빌립은 이 에티오피아 사람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성경은 빌립이 세례를 준 이후, 성령께서 그를 이끌어 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시는 기쁨으로 그의 길을 갔습니다. 이것이 광야 입니다! 내시들이 하는 일들은 주로 하렘(아내들)을 보좌하고 성전을 지키고 여자들의 시종을 듭니다. 여러가지 종교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신앙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다녔었지요. 그는 아마도 죽음 뿐인 삶에 생명을 가져다 주시고 희망이 없는 곳을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 매료 당했는지 모릅니다.어느 선교사들이 전한 종교 안내 책자를 보았을 수도 있겠고 아마 그가 성경이 쓰여진 스크로을 샀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빌립이 그를 찾아냈으며 광야에서 생명을 주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가 중요한 직책을 가진 장관이나 여왕을 보좌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는 이런 믿음을 전해 받은 일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다 내시이기 때문에 아이를 생산 할 수 없다는 것으로 그의 믿음, 그의 열렬한 믿음이 결코 충분하지 않았을 수 있겠지요.그는 중요하지 않은 보잘 것 없는 사람 이었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신명기 23:1절을 보면, 고환이 터지거나 음경이 자린 사람은 주님의 총회 회원이 되지 못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는 광야 길로 여행 했으며 “사막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알려졌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늘 광야에 있었던 어느 한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생육하고 번성 할 것이라고 했었지요. 그것이 그들의 의무 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이를 생산 할 수 없는 사람 이었습니다,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 하기 위하여 모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회당 바깥에 서 있는 것, 멀리 성스러운 장소를 보며 소망 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나 사라처럼 아무리 신앙이 깊더라도 하나님께 경배하는 사람과 같이 환영 받을 수 없는 사람 이었습니다. 이방인이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세례는 받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의 광야 길에서 일어 날 수 없는 일 인 거지요. 거절 당하고 야유 받으며 외설적인 말로 그를 조롱 했을 것 입니다. 그는 흑인에다가 이방인이며 겉모습만 남자 였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산다는 것은 자식을 통하여 이루어져간다고 믿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본다면 그에게 영생은 없는 것 이었지요. 어떤 꽃조차 이 광야에서는 자라지 않습니다- 사막 이니까요;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는 빌립을 인도 하셔서 그 길로 인도 하셨으며 이 이디오피아 사람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 본문을 설명하자면 이 본문 속에서 그 이디오피아 사람의 상황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느꼈을 수모와 정의는 그를 외면 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길은 광야 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 함 없이는 아무 곳도 아닌 그 길은 그런 곳이지만… “그들이 함께 길을 가고 물을 찾았으며 …그리고 빌립은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는 기쁨으로 돌아갔습니다”가끔 인생은 광야와도 같으며 우리의 매일 매일이 척박한 곳 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지난 날 우리가 힘들었던 것을 기억 하고, 서로의 의견이 달랐던 것, 무시를 당했던 경험, 배신당하고 무시 당했던 것을 기억 합니다. 우리는 지난 간 날 실망하고 슬픔에 겨웠으며 너무나 상심하면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며; 우리를 척박한 곳에서 다시 물이 흐르게 할 생명수는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 했지요. 우리는 아마도 교회가 사람들로 가득찼던 주일을 기억 하실 것입니다;우리들의 인생이 혼란할 때 답을 찾기 위해 질문 하고 고달파 했던 것을요. 교회는 천사에게 부름을 받은 빌립과 같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희망 없는 곳, 도움이 없는 곳, 사랑이 없는 곳을 찾아 가셔서 인생을 소생 시키시고 다시 인생을 채워주는 성령의 물을 부우셔서 변화 시키시고 사막과 같은 인생이 아름다운 정원으로 변화하게 하십니다. 빌립은 천사의 부르심을 무시하고 한사람이 구원 받을 기회를 막아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여 나아가 희망없이 인종 받을 수 없을 거라 믿었던 사람을 만났습니다.빌립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 인정 받는 사람, 하나님께서 품으시는 사람이 되게 하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게 하였습니다. 그는 종교와 세속적인 세상의 경계를 넘어 광야에서 생명을 창조 하였습니다. 살아있는 포도나무가지가 되게 하였습니다. 빌립은 그 이디오피아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베풀어 그의 광야같은 삶을 푸른 초장같은 삶이 되도록 바꾸었습니다. 좀 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같은 포도나무 가지로서 같은 물의 근원지를 나누면서 어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나요? 우리는 빌립처럼, 예수님처럼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어떤 말이나 희망, 도움 그리고 사랑의 증거가 변화로 인한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고 행동한다면 광야가 그대로 사막인 채 남아 있을까요?어떤 사람들은 편견과 관습이 다른 것으로 혹은 언어가 달라서 또는 경제적인 차이로 인해서 소외 되고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우리의 이웃이 입는 옷에 따라, 먹는 음식 냄새로 인해 혹은 사람들의 부적절한 행동으로 인하여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웃으로부터 없신여김을 받습니다.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이 사는 지역에 선택하여 산다는 이유로 아니면 그들의 모국어를 유지한다고 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물에서 나왔을 때 그는 기뻐하며 돌아갔다!”했습니다. “여기 와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영을 함께 드립시다, 우리는 너무나 오랜 시간 침묵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을 기뻐 받으실 것 입니다, 그러니 기쁨의 감사를 하나님께 드립시다.”이것이 저의 신앙 고백 입니다!
St. David's United Church, West Vancou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