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3:16요한복음 3장 16절 March 14 202
이번 주 초에 유튜브에서 하는 스포츠 게임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떤
사람이 3:16 이라고 씌여진 싸인을 들고 있는 것이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여러분 중에
얼마나 많은 분들이 운동 경기에서나 문화 행사 혹은 오락 행사에서 요한 복음 3:16 이
종이에 휘갈겨 써진 것을 보면 신물난다 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요한복음을 듣기도 하고 읽기도 합니다. 이 구절은 쉽게 인용 할 수 있는
구절 이지요! 우리는 이 구절을 마음을 써서 주목 하는 일은 거의 드물고 또한 많은
원칙주의자들이 성경을 외우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자 할 때 이 구절을 사용
합니다만 사람들이 주목 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학에 대한 논쟁을 할 때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자 할 때 딱히 떠오르는 구절이 없을 때 이 구절을 사용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눈에 띄이는 표시처럼 이 본문을 사용 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구원에 관련해서 쓰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거나 혹은 두려워
하게 하는 말씀인지 어떤지를 확신 하지 못하겠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원칙적으로는
신앙의 기본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쉽게 떠 올릴 수 있는
너무나 자주 인용이 되는 말씀 이라는 것 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차에 붙여진 스티커에 이런 말씀이 씌여져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으시오, 지옥을 두렵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이 뭔가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고, 대부분; 우리의 인간 관계,질병,
직업이 없는 것;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며; 지속적으로 우리를 분열
시키는 문제들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 어떤 사람들은 무엇인가 문제가 될 일이나 그로
인해 위협 받고 위험에 놓이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믿음의 세대가 다른 세대에게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이 그들의 말씀이 그들의 청중들에게 잘 전달이 되지 않는 것
같다고 합니다. 만약 교회를 흔들만한 사안이 있거나 목숨과 관계 있는 문제여서 구원과
희망이 보이지 않지만 희망을 얻고자 할 때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예배를 마치며 설교자는
마음이 떠난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을 다시 한 번 더 상기 시킵니다.
하나님의 제단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따르는 곳,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에 답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참 쓸데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가지고 있지 않은데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라든지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실패나 뭔가 이상한 것을 잘 알고
이겨 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묵상 해야 하는 주제는 회개 입니다. 하나님께
회개를 해야 하는 때 인 것이지요. 정죄와 회개는 사순절 기간에 강조 되는 주제 입니다.
교회력에 맞추어 사순절을 상징 하는 어두운 보라색이 교회에 걸립니다. 교회의 전통에
따라 사순절 기간에는 결혼이나 행사를 금하고 행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 기간
동안에는 교회에 아무 행사도 없습니다! 교회 전통을 철저히 따르는 교단에서는 용서를
확신하는 영광의 찬송을 줄이므로 부활절의 할렐루야를 극적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순간을 놓쳐 후회 하지 않기 위하여 “땅 위의 만족” 을 포기하고 일상의
삶을 조심 하고 절제 하며 보내는 시간 입니다.
2
John 3:16요한복음 3장 16절 March 14 202
사순절은 한 해 에 한 번 쯤은 자신의 죄성을 한탄 하며 돌이켜볼 수 기회를 주는
기간 입니다. 수세기를 지나오며, 일년에 한 번 씩 돌아오는 이 기간은 기독교 전통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잘못을 발견해 보는 때 입니다. 성경에서 사순절 기간 동안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을 찾는 것은 쉽습니다. 이는 강압적인 우리들이 삶의 모습을
드러나 보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노래들, 슬픈 이야기들, 비극적인 시절에 대한
이야기들, 정죄에 관한 것, 파괴와 죽음, 이 모든 것들은 성경으로 부터 보호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확신하건데 성격이 보여주는 증거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 이겠지요?
민수기의 말씀을 보면 히브리인들은 “ 광야에 있었습니다.” 광야는 험한
지역입니다; 먹거리, 물, 바람과 해를 피해 쉴 곳을 찾기 힘들고, 작은 해충과 뱀과 전갈로
부터 위협받는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그들의 광야 생활은 참으로 험난했습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고난이지요. 그들은 험난한 곳으로 이끈 모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하나님께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요청 했습니다. 그들의 이런 불평은
하나님의 정죄와 벌을 면하게 했으며 그들의 안전을 지키리라는 믿음으로 동으로 만든 뱀
모양의 지팡이를 만들어내게 했으니까요. 정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들을
에굽에서 불러내신 분이 하나님이라 믿었기 때문이었지요.
에베소서에 보내는 바울서를 보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죄 하시지만 언제나 우리를 위하여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한번은
영적으로 죽어 있었을 때,” 라고 말하고 있으며 “영적인 죽음 상태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구워
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사순절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값없이 주시는 것 입니다.
많은 노래들이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너를 사랑해 왜냐하면 너의 눈이 파래서,
너의 마음이 진실해서, 왜냐하면 넌 내가 필요할 때마다 항상 내 곁에 있잖아 왜냐하면…”
뭐 이런 노래를 알고 있을 것 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뭔가 사랑하는
이유나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해보지 않은 질문을
여쭤보겠습니다. 최소한 의문은 가졌을 법 한 질문입니다: 왜 저를 사랑 하십니까? 이
질문을 하나님께 해 보십시오. 그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선 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도덕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눈을 가졌기
때문이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 그 분 자체가 사랑이시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 입니다: 어떤 동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별하지 않으시고 사랑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놀랍고 믿을 수 없는 일 입니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요. 우리가 기억 할 수 있을 때 부터 우리 인간은 사랑 하는 법을
배웁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서 다정하고 친절하고 아름답고 선하며 우리의
이해를 다하여 사랑 할 수 있는 이유를 찾고 배웁니다. 사랑받을 이유가 없다면 노력은
허사입니다. 이유를 따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존재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 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는 성자의 수준이어야만 한다는 말이 아닐까요?
3
John 3:16요한복음 3장 16절 March 14 202
믿는 자들이 오랜 시간 동안 이 문제를 고민 해왔습니다. 어떤 이론은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가 도덕적이고 선한 행동을 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무수한 신학자들의 많은
신학 이론이 있으니까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무가치 함으로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분노를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내시고 그 분을 십자가에 매달았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비참하게 사는
인생으로 부터 구원하시기 의하여 목숨을 내어 놓으셨기에 그 분께 빚을 진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3:16은 여러가지 생각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 사랑 하셔서 그 아들 예수를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는 비유가 탕자의 비유입니다.(사랑이 많으신 부모가, 즉
하나님께서, 집을 떠나 모든 것을 잃고서 돌아온 바보같은 아들을 너무 환대 하십니다.
집에 돌아 온 우리를 환영 하시는 것 처럼; 우리를 지극 정성으로 극진히 환대 해주십니다,
모조리 탈탈 털리고 돌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정죄를 받는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사랑 받고
있습니다. 오래 전 성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받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친절하고 인정 받으면 자랐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미움 받고 학대 당하며
그리고 거절을 경험하고 자라난다면 건강하게 살아가는 조화로운 삶을 온전히 누리지
못할 것 입니다.
부모들은 온 정성을 다하여 사랑을 아이들을 키웁니다. 또한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게 하고 위험한 일이나 아이들의 미래가 어떤 유혹으로 인하여 아이들의 미래가 고통
속에 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여 키웁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하여 규칙과
아이들의 자유를 제한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아이들의 혼내고 벌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것 입니다. 아빠나 엄마가 아이들을 사랑 하는 것 처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도 있지만 것 혹은 거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은 변함없이 동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친절한 사랑을 받는 것은 마치 아이들이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잊지않게 하시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의 증표로
보내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랑의 완전한 모델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을 것 입니다. 사랑 하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당하시고
우리의 모든 짐과 두려움, 의심과 무엇이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담당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에 대해 우리가 할 일은 오로지 순종, “예”
입니다!
이것이 사순절에 우리기 기억 해야 할 것 입니다. 요한 복음 3:16절은 이를 기억 하는
말씀 이며 증표이며 우리의 희망이며 또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입니다.
4
John 3:16요한복음 3장 16절 March 14 202
이것이 저의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