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ne 27, 2021 " CLEARING OBSTACLES?" Rev. Dal McCrindle오늘 본문 말씀은 제가 대학교 다닐 때 배웠던 옛날 복음송 가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실은 이 가사는 1963년에 씌여졌다는 것이 아니고 그 해는 제가 대학을 다녔던 때였습니다. 이 찬송은 그 시절 연합 교회가 즐겨 부르던 찬송이 아닙니다. 연합 교회는 극히 전통적이거나 감정적인 찬송을 삼가 해왔었습니다. 그 찬송은 “그분이 나를 어루만지시네” 라는 곡으로 복음주의 교회에서 즐겨 부르던 찬송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변화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마가 복음에 나오는 내용으로 사람들이 신비한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가사는 “무거운 짐의 쇠고랑에 묶여, 죄책감과 수치심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예수께서 나를 만지시니, 이제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라네.”이를 오늘날 말로 해본다면, 예수께서 절망 가운데 있는 자에게 찾아오시고 그가 예수님께 손을 내밀어 그분을 만졌다. 아무튼, 이전의 해석이든 오늘날의 해석으로든 그 결과는 동일합니다 – 그들은 고침을 받았다!마가는 예수님을 만나자 많은 일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변화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문제가 있는 사람들, 건강의 문제 이든, 다른 문제이든 하나님께로 믿음을 둔다면 변화가 있으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그가 나를 만지시네; 오- 그분이 나를 만지시니 내 영혼에 기쁨이 넘치네! 무언가 변화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아네, 그 분이 나를 만지시니 나는 온전하게 된다네.”60년대에는 연합 교단에 속한 교회 중 어느 교회 신도들은 하나님께서 만지신다는 표현을 하는 것을 감히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온전하게 된다는 것에 대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인즉, 뭔가가 부족하다는 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너무도 근본주의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 우리가 이것을 이해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만지시고 우리의 껍질을 깨뜨리신다는 것으로 이해 합니다.또한 하나님께서 만지심으로 고침을 받는다는 것은 이중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고침을 받은 것과 야이로의 딸이 고침을 받은 것이 비교되어 말하여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여자들이 등장하고 숫자 12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에서 나오는 인물들 모두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한사람은 혈루병을 가졌던 여인이고 또 한사람은 아이의 아버지 였습니다.말씀은 퍼져나가야 할 것 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만지심으로 고침을 받은, 기적에 관한 것 이었습니다. 이 본문은 최근 수십년 간 힐링터치 사역을 해온 부서에게는 좋은 구절이 되겠지요. 이 사역을 오랜 동안 지켜 본 어느 분은 주로 나이 드신 분들이 교회에 가서 힐링 터치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 분들의 삶에서 기본적으로 누군가와 신체적인 접촉을 하지 못한 분들이겠지요. 문 앞에서 사람들을 맞이하고 악수를 하고 혹은 가벼운 포옹과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들 말이지요 – 사람과의 접촉은 사람들의 인생을 아주 다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코비드로 인해서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 중에는 사람들과 가볍게 포옹하면서 인사 하는 것을 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어떤 설교는 예수님께서 낫게 하시는 기적에 대해서 중심을 두고 이 본문을 예로 들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증거하고, 하나님께서 삶과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시고 나타난 것을 말씀으로 전합니다.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를 건너오시면서 폭풍을 잠잠하게 것으로 시작 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예수께서는 무덤에 살면서 스스로도 해하던 귀신 들린 남자에게서 귀신들을 쫒아내신 사건 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쫒아내신 기적을 마가는 예수께서 우리들의 병든 몸을 낫게 하시고 심지어는 삶을 위협하는 것으로도 우리를 회복 시켜주시는 것으로 기록 하였습니다; 예수 께서는 병들어 죽었었던 혹은 죽음 문에 다다랐던 소녀를 살리셨습니다. 그 일을 하신 분은 “예수님” 이라고 마가는 말 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분이 우리가 기다리던 분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 세상을 뒤집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그분을 보십시오. 도움이 필요 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분이 여러분을 만지도록 하십시오. 아니면 여러분이 그 분을 만지십시오! 만지든 만짐을 당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차고 넘칩니다. 그 분은 우리와 상관이 있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온전 하기를 원하십니다.“저는 저를 축복 하시는 우리 구세주를 만난 후 부터. 그 분께서 저를 씻으시고 온전케 하신 후 부터 저는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찬양을 멈추지 않을 것 입니다; 사는 동안 저는 그분을 소리쳐 찬양 할 것 입니다.”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귀신에 사로잡힌 그 남자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기를 사정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 하시기를, “친구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복을 주시고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지금의 요르단 지방으로 가서 예수께서 그에게 하신 일을 널리 전하였고 그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일을 보고 놀라워 했습니다.지난 주 설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의 생명을 위협 하는 폭풍에 대해 겁을 먹었고; 예수님께서 간섭 하시기 전까지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던 것에 두려움을 가졌던 이야기 였습니다. 귀신 들린 그 남자는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그를 사로잡았던 것에서 놓여나게 되었습니다.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이 여인은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여인 이었습니다. 병이 낫고자 이미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 해 보았고 병이 낫고자 의사가 처방한 것들을 해왔었습니다. 그러나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혈루병은 12년 간 앓아왔습니다. 심한 병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유대인의 규율에 여인이 남자의 신체에 손을 대는 것은 규율을 어기는 일입니다. 특히나 피를 흘리는 여인이 다른 이의 몸에 손을 대다니요. 병을 낫게 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이런 규율을 어기고 그녀는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군가 그분의 옷자락을 만진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녀의 믿음을 아셨습니다. 군중들은 밀리고 밀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분과 눈을 마주쳤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손을 뻗쳐 그분을 만졌습니다. 이건 다른 상황인거지요. 그녀는 믿음으로 그분을 만나기 원했고 그로 인해 온전해지기를 원했습니다.그녀는 그 분의 발 아래 엎드려 그녀가 한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그분을 만진 것은 그녀이고; 규율을 어겼음을 말하였습니다. 믿음은 그녀가 규율을 어기면서까지 믿음을 실천하게 하였으며 그래서 그분을 행하여 손을 뻗어 만지게 하였습니다. 장애물은 그녀의 믿음으로 깨끗이 없애버렸습니다; 그녀의 믿음으로요. “무언가 변화가 나에게 일어났어요 저는 알아요, 그 분이 저를 만지시고 온전하게 하셨습니다.”다른 이야기는, 야이로 그가 아픈 것이 아니라, 그의 아픈 딸의 생명이 위독하여 근심과 두려움에 있었던 사건 입니다. 그는 회당의 지도자로 사람들에게 존경과 특혜를 누리던 사람 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유랑하며 설교하는 분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폭풍을 잠잠케 하시고 귀신을 쫒아내시며 혈루병 여인을 낫게 하신 위대한 분 앞에 엎어졌습니다. 그기 그 분 앞에 끓어 엎드리게 한 건 뭐가 그리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이었을까요? 잠자는듯 일어나지 못하는 딸의 코마 상태? 아니면 죽음의 문제 였을까요?어쨌건, 야이로의 절망은 그가 가진 사회적인 지위, 장애물이 아무것도 아니 것으로 걷어내게 하였으며 그를 예수님의 발아래 무릎을 끓게 하였습니다. 그는 딸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다 내어놓았습니다. 그에서 중요한 건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딸의 생명 일까요 아니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지역 사회와 회당에서 특혜를 누리는 그의 지위 였을까요? 그는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간구하며 예수께서 그의 딸을 보아주시기를 거듭 간청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라 가셨습니다. 병을 고침 받은 여인은 예수께서 삶과 죽음의 상황에 있는 딸아이를 보러 가는 순간에 있던 주변인이었습니다. 그 삶과 죽음의 문제는 우리들의 문제이고 교회가 듣고자 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 이니까요.우리들은 그 연인처럼 낫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찌 되었지요? 소식을 전하는 이가 달려와 말하기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귀찮게 할 이유가 이제는 없습니다. 포기 하십시오.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오로지 믿음을 가지라.” 기억 하십시오, 배 위의 제자들이 생명을 위협 하는 폭풍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때 말씀 하셨습니다, “두려워 말아라?” 이 말씀은 즉,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 나를 믿어라,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딸아이가 죽은 것을 알고 사람들은 이미 울고불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딸아이를 살려두고자 했던 그들의 극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요. 예수께서 너무 늦게 도착 하셨습니다. 그 딸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자신감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 12살 딸아이는 놀랍게도 죽음에서 일어났습니다.숫자 12: 저는 궁금 합니다! 저는 항상 숫자에 관심을 가졌왔습니다. 특히 항상 성경에 나오는 숫자에요. 숫자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마가가 아무 의미가 없이 숫자 12를 말했다 하더라도 여러분, 여러분은 숫자12를 들으면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물론 이스라엘 12지파입니다. 마가가 그들에게 메시아가 오셔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예수께서 오실 길에 장애를 없애라 하며 그리하면 너희가 고침 받고 회복되고 새로워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겉치레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여러분과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에 눌리고 불편한 건강상태에 깨어지고 피 흘리며 죽음을 마주한 상태, 우리의 삶이 분열되고 부패하고 부도덕하며 이기적이고 병들어 죽음의 위기를 마주한 심각한 상황에 있는 우리들에게 그분이 얼마나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얼마나 한지 그 분이 위대한 분 이신지 대한 이야기 입니다. 얼마든지 우리들의 깨어진 예는 수없이 많지요. “우리를 옭죄는 무거운 것들, 그 무게에 짖눌려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이 손을 우리를 향해 내미시거나 우리가 그 분께 손을 내밀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더이상 이전과 같은 사람이지 않다고 하십니다.무엇이 우리를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방해 합니까? 어떤 습관이 우리를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지 못하게 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혹은 교인들로인해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교회에서 환영 받지 못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거나 무시당하고 정죄 당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혹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살아온 삶으로 인해 스스로가 무가치하다고 느낄 수 도 있습니다. 결혼에 실패하고 삶이 엉망이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엉망이고 친구들과의 사이도 좋지 않고 약물에 중독이 되었다거나 교도소를 다녀온 적도 있는데 - 만약 이를 교회에 있는 어느 누군가가 이런 비밀을 알게 된다면 어쩌지요?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의 외모, 입은 옷으로 혹은 사회적인 위치로 판단하고 경제적으로 곤궁한 것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실까요? 그리고 우리들 에게요? 이 모두가 이스라엘의 12지파 백성들로 희망도 없었던 누군가가 환영해주기를 바라고 예수님께서 만지셔서 낫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아니었던가요? 그 군중들, 그들의 가족들 친구들 조롱하며 말했지요, “지금 거기 간들 무슨 소용라고,” 그들에게 여러분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 일 겁니다. 여러분도 보여지는대로 그 사실을 인정 하시겠지요;그 사람들 눈에는 죽은 사람이겠지요. 여러분의 믿음은 그들이 절대 받아들여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이겨내야 할 장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 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님께 닿을 수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데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그들이 예수님과 닿는 것을 방해 받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야야 합니다.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깥을 (다른 사람들을) 보는 것을 방해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12지파의 이스라엘 백성 으로써 누가 그분을 만졌든 만짐을 당했든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것은 그 분을 찬양 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전의 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변화되었다는 것은 치유 받은 사람과 그 기쁨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입니다.“그가 나를 만지시네; 오- 그분이 나를 만지시니 내 영혼에 기쁨이 넘치네! 무언가 변화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아네, 그 분이 나를 만지시니 나는 온전하게 된다네.” 누가 이든지? 어떤 이유이든지? 우리를 그분께 가까이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누가 외면당하고 환영을 받지 못합니까?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여러분, 이것들을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이것이 저의 신앙입니다.
St. David's United Church, West Vancou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