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16. 2021 - Christ Among Us - Rev. Dal McCrindle여러분은 가끔 설교 본문에서 성경 구절이 두어 구절이 빠진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하루에 읽어야 하는 양이 주어진 설교집을 읽다가 한 구절이나 두 구절이 빠진 것을 발견한다면, 저는 왜 이 설교집을 만든 이가 이 구절들을 왜 생략했는지 궁금 합니다. 보통 그 부분은 뭔가 생각을 하게 만들고 불편하게 하고 아니면 뭔가 깊은 뜻이 있습니다.오늘 말씀은 바로 그런 부분의 말씀입니다. 예배를 시작하면서, 누가가 예수께서 교회에 개입 하신 기쁜 소식에 대해서 기록한 말씀으로 시작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8-20장을 보면, 제자 중에 한사람이며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의 죽음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왜 그 부분을 말하면서 이렇게 저돌적으로 기록 하였을까요? 어떤 이야기를 말하려고 한 걸까요? 그러기 보다는 누가가 그가 두번째 기록한 말씀을 거룩한 말씀으로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우리가 알다시피 교회는 예수님이십니다. 심하게 찢기고 상처 입으신 몸 (교회) 이지요. 여러분이 만약 예수님을 배반을 암시한 구절을 찾고자 한다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만찬 부분을 찾아보시면 됩니다. 이 부분이 성금요일을 드러내 주며 우리들 자신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그런데 이는 부활절 기간이지요! 예수께서 부활 하시자마자 왜 우리는 여전히 교회 안에서 죽음 배신과 죄와 씨름해야 합니까? 아마도 이건 항상 있었왔던 사실이 아닐까요? 사도행전에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보며 우리는 여전히 부활절 이후에 일어난 상황에 있으면서 유다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용서하시며 그리고 제자들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유다에 대해 솔직해지기 이전에 우리 자신에 돌아다 봅시다. 이 이야기는 달콤하거나 빛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막 태어난 교회는 공격을 받고 나누어지고 의견이 나누어지고 정치적인 힘에 간섭하고 사단의 역사가 있습니다. 비단 교회 외부에서 생기는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닌 교회 안에서 믿음이 있는 공동체 안에서 생기는 일입니다.세월이 지나가면서 교회는 여러 소문에 휩싸였습니다. 한 번 일어난 사건이 아니지요. 목사님이 성적인 문제를 일으킴으로 교회가 흔들리고 교회가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단지 목사님 뿐이 아니라 교회 전제에서 일어납니다. 제 기억에 보통 2센트씩을 헌금 하던 시절에 어던 사람들은 일년에 한번씩 1불을 ( 큰 돈을 냄으로써) 헌금으로 내면서 사람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던 것을 기억 합니다. 또 나이가 드신 어떤 분은 그 목사가 교회에 있는 동안에는 교회에 헌금을 할 마음이 없노라 선언하기도 하셨습니다.사도 행전은. 특별할 것이 없이 온통 죄로 둘러싸여 있어 우리들에게 슬픔을 줍니다. 아마도 죄로 둘러 싸인 사람들은 특별히 성직자나 일반 성도들 중에서 자신들이 법 위에 있다고 믿으며 그들이 믿기를 (그들의 마음으로는) 그들이 교회에 기부한 것이 그들의 도덕이나 법적인 조사로 부터 예방을 하게 하는 일이라 믿는 것과 같다고 믿습니다.유다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한사람 있습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 했던 사람으로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았지요. 이유가 무엇 이었든지간에, 예수님을 배신 한 것이든 아니면 그로 하여금 그런 일을 하게 하였든, 유다는 권력을 가진 자에게 예수를 팔았습니다; 그의 스승을 배신하고 댓가로 받은 것이 은 이었습니다. 배신을 했다는 이런 비극은 300전 전이나 10년전이나 지난 주나 그 일은 동일 합니다.누가가 기록하기를: (18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19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이 말씀은 시편에 기록 되었으며,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그리고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라고 했다.이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했던 첫번째 교회의 모습입니까? 내장:창자: 피. 너무 험악하지 합니다. 성경집을 만든 사람들이 이 부분들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내장 이라든지 창자 피 등의 표현되는 유다 인생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하지 않음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려 좀 더 매력적인 말씀으로 대체하였습니다.좀 더 매력적인 말씀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배신당하는 모습도 드러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교회는 그 상황을 돌려 교회의 일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고 교회 위원회와 법에 관계되는 것도 보고 하며 성서와 관련이 되는지를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누군가를 비난 하거나 아니면 전혀 죄도 마귀도 없었든 듯 한다는 것 입니다. 교회의 소란은 그대로 덮어집니다. 세탁소에 옷을 맡기고 세탁 후 다시 찾아 오는 것 이지요.그런데 누가는 유다에게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절을 알리는 광고를 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는 위기를 이겨내야 할 것 입니다. 비 호감을 없는 인물 마티스를 뽑아서 “유다의 사건”을 부드럽게 잘 해결해야 할 것 입니다. 누가는 우리로 하여금 긴 시간 고통 속에 있게 하였으나 솔직히 말하자면 유다의 사건을 진솔하게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면, 유다는 교회의 죄로 인해 죽었습니다!몇 주전에 예수께서 하신 충격적인 말씀을 생각해봅시다.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그러자 모든 제자들이 서로에게 의문 했지요, 자신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그들 중에 배신자가 없으리라 믿으면서 말이지요. 확실히 저는 아니지요, 주님! 저희는 정말 아니지요!슬프게도, 그분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배반 할 자를 찾는 다면 우리는 식탁에 모인 우리의 주변을 돌아다 보겠지요. 베드로가 기록하기를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다른 이들 처럼 유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처음으로 받았던 사람 이었습니다. 나머지 다른 제자들 처럼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한 증인이며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한 사람 이었습니다. 비록 유다가 처음부터 함께 한 제자라고 할지라도, 비록 그가 예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유다는 “예수님을 체포하도록 이끈 사람” 입니다. 이 충격을 교회의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 역시도 거기에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누가는 교회의 역사에 대해 차분히 정리 하였습니다. 현대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의 권위만을 갖는 것이 아니고 또한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의 사실 역시도 함께 가진다는 것이지요. 우리 주님은 그 분을 배신한 사람이 그 때 그분과 함께 했던 사람들 중에서 였으며, 지금은 우리들 이지요, 이것이 교회 역사의 시작이란 말인가요? 성경집을 만든 사람들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이것을 피하고자 했습니다. 교회가 임시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바구니 안에 있는 섞은 사과 하나를 없애려 했으며, 퇴보 한 것 이지요, 이는 너무나도 솔직하게 교회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일이며 우리는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것 입니다.사도행전의 시작은 거룩한 성령이 유다에게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 좋은 기독교 인으로 부활절 이후 당당히 걷기 이전에 우리 뒤에는 부끄러운 금요일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 입니다. 누가는 유다의 뿌려진 피가 우리의 성가시게 만듭니다. 이와 함께 교회가 시작 되었습니다-우리들의 이야기 인 거지요. 어떤 성서 해석자들은 말해 오기를 누가는 단지 예수님의 부활 이후 교회의 영광만을 강조 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말은 믿지 마십시오. 저항과 배신과 협상 그리고 거짓이 제자들과 함께한 마지막 목요일 날에 있으며 부활절 이후에도 교회 안에 있습니다. 유다 사건을 겪고, 아나니아와 샆비라와 그리고 빌립과 베드로 사이의 옥신각신 하던 일이 이방인을 대하는 것들 ; 그리고 추한 일들은 역사 속에서 계속 이어지며, 우리의 교회 안 에서 그리고 우리의 마음 속에서 계속 일어나는 일이란 것입니다.누가는 마태와는 다르게 유다의 사건을 넘어 그의 배신과 죽음이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이런 다른 기록이 예수님을 배신 한 것에 대해 다르게 해석 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돈과 권력, 안전과 기만을 넘어 힘들게 만들었으며 -이 모든 것들은 아름다운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마도 우리 주님에게 딱 붙어서 큰 기업을 운영하며 하나님을 배신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기업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쪽에 써비스라는 명목으로 돈을 지불하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운영하고 지켜야 할 선을 무시하고 죄를 저지르면서 누군가와 부적절한 관계를 갖는다거나 우리의 이웃과 사랑에 빠지는 일도 합니다! 이런 우리의 행위는 단순하게 말해 추악한 것 입니다. 다른 사람을 고려 하지 않는 행위 입니다. 다른 이유이지만, 다른 사람 이지만 다 같은 결과인 겁니다. 같은 성경 말씀 이이지요 사도 행전 1:15-26.사도 행전을 보면 교회의 역사는 계속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복음의 좋은 소식은 여러 모양으로 인해 거절 당할 수 있습니다: 정부의 지도자들, 유명한 무리들, 에베소에 있는 중심 인물들, 학자들, 정부 관료들. 그러나 그들을 말하기 이전에 좀 솔직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 봅시다. (성경집을 통해서는 우리가 우리를 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 복음은 훌륭한 교회에 속한 교회에게서 거절 당해 왔습니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군가로부터 외면 당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있어야 할 일 처럼 할당을 받아 이어져 왔습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유다 입니다! 감사한 것은 갈보리 십자가에 달리신 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식탁에 둘러 앉은 우리를, 컴퓨터 앞에 앉은 우리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예수님을 버렸던 우리가 돌아 오는 때 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용서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과 배신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 입니다.이것이 저의 신앙 고백입니다.
St. David's United Church, West Vancouver